[문학마당] 숨겨둔 우울 허문정 수필
2019. 08. 26(월) 18:02 가+가-
사방이 검은 색 뿐인 풍경은 언제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는 암울한 기운과 겹쳐 마치 생명이 없는 곳처럼 느껴졌다.

건물마다 온갖 화려한 색깔을 입혔건만 어김없이 올라앉는 석탄가루. 아무리 깨끗이 씻고 교복을 빨아 입어도 개운하지 않았다. 가정 형편으로 충청도에서 강원도 탄광촌으로 전학을 가야만 했던 여고 2학년 때, 어설프고 낯선 환경은 적응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3학년이 되자 명문 S대를 나온 젊은 선생님이 담임이 되었다. 가을 체육대회 날이었다. 대학 진학반은 교실에 남아 공부를 하고 나머지는 체육행사에 참가하라고 했다. 내 바람과는 달리 교대를 가라는 부모님과 의견이 맞지 않아 나는 비진학 반에 속했다. 그때 교대는 등록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가운 햇볕아래서 땀을 흘리자니 공정해야 할 교육현장에서 차별대우를 하는 게 못마땅했다. 가난한데다 아들이 우선인 우리 부모가 야속했다.

눈은 자꾸 유리창 너머 책장을 넘기고 있을 친구들을 향하고 열띤 응원가는 귓전으로 흘렀다. “이건 너무 불공평 해!” 불평을 쏟아놓고 친구 하나를 꾀어 운동장을 빠져 나왔다. 그 친구 집에 가서 라면도 끓여 먹고 시내를 싸돌아다녔다. 온 종일 그러고 나니 좀 후련했다.

체육대회가 끝날 무렵 학교로 돌아오는데 반 친구들이 체육복 차림으로 쪽문을 통해 달아나고 있었다. 쫒아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따라와 보면 안다고 했다. 내 불평에도 묵묵히 앉아있던 친구들을 영문도 모르고 뒤쫓는 게 싫어서 그만뒀다. 뭔가 석연찮긴 했지만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등교하니 교실은 텅 비었고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내가 없는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선생님들은 외부에 알려질까 전전긍긍하면서 친구들 찾기에 애가 탔다. 통금시간이 있던 시절이라 산간지역에서 작정하고 숨어버리면 찾아내기 어렵다. 체육복 차림으로 달아나던 친구들의 뒷모습. 연락도 없이 애간장을 녹이던 친구들은 산속을 헤매다 이틀 후 돌아왔다.

학교로 돌아온 친구들은 내가 주동자라고 몰아세웠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으나 학교에서 마련한 빵과 우유를 나눠주며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사과를 했다. 친구들은 모두 노려볼 뿐, 내 말은 듣지 않았다. 이틀간 먹지도 씻지도 못한데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 후줄근한 체육복 차림의 친구들은 여학생의 몰골이 아니었다.

바람은 내가 원하는 곳에서 불어오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나는 혹독한 왕따를 당했다. 서로가 서로를 베어버리는 아픈 우정, 순간의 일탈이 하루아침에 나와 친구들을 낯선 사람으로 만들었다. 아무도 나와 말을 하지 않았으며 내 행동 하나 하나에 시비를 걸었다. 동화 속 박쥐처럼 날개가 있으니 새라고 우기다가 쥐를 닮았으니까 새가 아니라고 우기듯, 먼저 운동장을 빠져 나간 주동자가 이튿날은 모범생인 척 등교한 배신자라는 게 친구들의 주장이었다.

선생님들에 대한 야유도 만만치 않아 수업이 중단되기 일쑤였다. 지각 한 번 없던 내가 조퇴를 반복했다. 오기로 결석은 하지 않았지만 학교가 지옥이었다. 요즘 종종 학교 왕따 소식을 접할 때면 그 때의 일이 생각나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아프다. 책을 펴면 책을 빼앗아 던지던 친구들. 배신자로 낙인찍힌 채 추운 계절을 보내느라 하루하루가 위태로웠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다행인 것은 2학년 때 담임이었던 오 선생님이 집으로 불러 토스트를 구워 주며 다독여줬다. 선생님이 입던 티셔츠도 여러 장 줬는데 셔츠에서 향긋하고 상큼한 냄새가 났다. 향수 냄새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교복 외에는 마땅히 입을 사복이 없던 나. 셔츠에 코를 박고 있으면 한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배의 과육은 나에게 주고 씨가 있는 부분을 맛있다던 선생님,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둔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갈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이 손잡아 준 덕분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당시 친구들도 많이 두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처벌 받지 않기 위해 단체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고, 친했던 친구와 하루아침에 안면을 바꾸자니 괴로웠을 터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던가. 먼저 운동장을 빠져나간 나, 지금 생각하면 내가 사태의 발단일 수도 있는데 혼자 등교하니 배신감은 오죽 컸으랴.

어둠속에서는 밝은 곳을 볼 수 있으나 밝은 곳에서는 어둠 속이 보이지 않는다. 함께 어둠에 들어야 서로를 볼 수 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때 내가 운동장을 빠져나가지 않고 선생님께 항의 하든가, 그냥 참자고 다독였더라면 어찌 됐을까. 그냥 따라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뒤늦은 후회, 좋은 학교에 한 명이라도 더 보내고 싶었을 담임선생님의 마음도 이제는 이해가 된다.

졸업 즈음에는 책상 밑으로 먹을 것을 밀어주고 만나자는 쪽지가 책상서랍에 놓였다. 막힌 가슴이 조금은 트였으나 이렇다 할 화해 없이 졸업을 맞았다. 명쾌하게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졸업한 것이 ‘손에 들고 던지지 못한 돌처럼’(나희덕의 시에서 인용) 여태 마음을 무겁게 눌러왔다. 이제는 만나면 화해 없이도 웃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란 말이 있듯 거자필반(去者必返)이란 말도 있다. 세상의 어느 끝에서 우연처럼 만날지 모른다. 만나서 환하게 웃을 그날을 생각하며 숨겨온 우울을 이제 힘껏 던져 버린다.


<약력> 월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원, 광주문인협회원, 대표에세이, 무등수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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