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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밖 화가들]]예술과 돈, 경계에 선 화가 앙리 루소
그림 속 ‘나’만의 세상에 펼쳐진 꿈과 환상의 예술세계

2019. 04.03. 18:50:26

앙리 루소 作 ‘잠자는 집시’ (1897년 캔버스에 유채)
1893년 마흔 아홉, 22년간 몸담았던 세관을 떠났다.

타의도 아닌 루소 자신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이제 진짜 화가로만 살아가려는 것이었다. 평생 갈망해왔다. 예술로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을 위해 루소는 과감하게 은퇴를 선택했다. 8년 전, 마흔 한 살이 되고부터 작업실도 마련했고, 공식적으로 작품도 발표했다. 하지만 세관원이란 꼬리표 탓이었을까. 일요화가, 아마추어화가, 두아니에(Le Douanier, 세관원이라는 뜻)란 말은 떠나질 않았다. 그래도 그림은 인생의 모든 것이었다. 예술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했다. 다른 화가들처럼 학교에서 그림을 배우지도 못했고, 당연히 형편이 넉넉하지도 못했다. 그림만으로 살 수 있다면 왜 ‘두아니에’라는 별명을 감수하면서까지 계속 매달려 있었겠는가.

고등학교를 다닌 게 학교생활의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함석노동자였고, 루소가 24살이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가장의 무게는 루소의 어깨로 내려앉았다. 어머니를 부양해야 했고, 다행스럽게도 파리 관세청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두아니에’(세관원)이란 별명도 있었지만, 그가 한 일은 극히 단순한 업무에 불과했다. 그저 앉아서 통행료를 징수하는 것 뿐,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루소의 마음 안에 있던 예술적 자아는 늘 그렇게 꿈틀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었던 게다.

어머니도 부양해야 했고, 가족의 생계도 책임져야 했기에, 정식으로 그림공부를 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갔다. 루소에겐 다른 스승이 없었다. 그에게 스승은 오로지 ‘자연’이었다. 자연보다 나은 스승도, 교육도 존재하지 않았다.
앙리 루소 作 ‘꿈’ (1910년 캔버스에 유채)

주중에는 열심히 일을 했다. 센강을 드나드는 물품들에 정확하게 세금을 징수했다. 특별히 머리를 쥐어짜거나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주어진 공식대로 계산해 세금을 징수하면 임무는 완료된다. 이건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아주 훨씬 쉬운 일이다. 공식대로만 하면 되니까. 틀리지만 않으면 된다. 설사 틀린다 해도 고치면 된다. 그렇게 일주일 내내 일을 하고, 일요일이면 온통 그림을 그렸다. ‘자연’이란 스승을 따라가기 위해 그리고 또 그렸다. 어려운 일이었다. 세관업무는 답이 있지만, 그림에는 답이 없다. 자신만의 예술이란 답을 찾아가기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또 그렸다. 그렇게 루소의 일상은 철저하게 이분법적인 생활이었다.

마흔 살이 되던 1884년에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그림을 따라 그릴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앞서간 거장들의 그림을 맘껏 보고 따라할 수 있는 기회였다. 또 다른 스승이 생긴 것이다. 마흔 한 살이 되었을 땐 작업실을 마련했고, 화가로 앙데팡당전에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세관원 앙리 루소가 아닌, 화가 앙리 루소의 삶도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다.

루소에게 그림은 어떤 것이었을까. 배우지 않았기에 자신만의 독자적인 그림이 가능했을 터. 루소가 활동하던 당시 프랑스는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도 못했고, 인상주의의 혁명 이후 많은 작가들, 예술사조가 꿈틀대는 시기였다. 하지만 루소에겐 그들과 함께 한다는 건 한낱 꿈같은 일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자신에게 주어진 짐들은 가히 가벼운 게 아니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일요화가란 별명도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게 아닐까.
앙리 루소 作 ‘풍경과 나 자신의 초상화’ (1890년 캔버스에 유채)

루소에게 세상은 현실과 현실 너머의 세상 두 가지였다.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가족과 돈벌이, 그리고 예술이라는 현실 너머의 세상.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루소의 그림은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당연한 것 같다. 그에게 그림은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세상이었고, 그 세상은 루소의 자아를 확인시켜 주는 세상이었다. 유일하게 꿈꿀 수 있는 세상, 그림 안에서 가능한 세상이었다. 다른 이들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그는 당당하게 화가였다. 루소의 자화상인 ‘나, 초상-풍경’엔 루소의 예술에 대한 갈망, 화가로서의 자부심이 당당하게 드러난다. 센 강의 강둑에 자신이 서 있고, 베레모를 쓰고 팔레트와 붓을 쥔 손은 화가임을 더 강조한다. 그리고, 팔레트 위의 글씨.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두 아내 ‘클레망스와 조세핀’을 새겨놓았다. 배경엔 열기구, 만국기, 에펠탑 등 당시 파리 사회를 상징하는 것들이 보인다. 사회 속 화가로서의 한 인간인 자신을 이렇게 새겨놓은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조국에서 당당하게 화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보여줬던 것이다.

세관원이었던 그저 평범한 자신과, 화가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멋진 예술적 성과를 보여주고 싶었던 자신, 그 둘의 사이에서 루소는 늘 예술을 갈망했다.

인상주의 작가들과의 교류도, 또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지도 않은 루소에게 자연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려내는 건 또 다른 도전이었다. 넉넉하지도 않은 형편에 여행은 꿈꿀 수 없었고, 루소가 찾은 곳은 식물원이었다. 여러 식물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그려보며 자신만의 상상의 정글을 끝없이 그려갔다.
문희영 <예술공간 집 관장>

천재는 천재가 알아본다는 말처럼, 르누아르가 루소의 그림에 감동하고, 로베르 들로네의 소개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만났으며, 피카소는 루소를 위해 파티를 열고 그의 작품을 찬미했다. 젊은 피카소에게 루소의 예술세계는 여지껏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였다. 루소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집시 여인’(1897)은 천재화가 피카소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봤던 미술상인 칸바일러가 구입했다. 전시출품예정이었던 작품이었지만 감쪽같이 사라지고 13년이 지난 뒤 나타났다. 그간 그림은 심하게 훼손되었고 다시 복원을 했지만 가짜가 아닐까 하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림을 그릴 당시 루소는 형편이 너무 어려워 시장님께 그림을 구입해달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또 다른 대표작인 ‘꿈’(1910)은 루소가 세상을 떠나던 해 그려진 마지막 시기의 작품이다. 루소만의 독특하고 원초적인 순수한 표현이 더욱 돋보이는 작품들로, 당시 많은 화가들에게도 영감을 줬다. 말년에서야 예술적 성과를 인정받았고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던 루소는 1910년 세상과 작별했다.

“이뤄질 수 없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것은 그런 꿈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앙리 루소.

광주매일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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