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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수

[그림밖 화가들]예술과 돈, 경계에 선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
절제의 미덕…경건하고 소박한 생활이 가장 ‘아름다운 삶’

2019. 03.07. 18:52:26

요하네스 베르메르 作 ‘우유 따르는 여인’
(Johannes Vermeer)

사후 200여년이 돼가는 즈음부터 베르메르는 미술사에서 ‘재발견’돼갔다. 베르메르는 그야말로 잊혀졌던 화가였다. 프랑스의 미술비평가이자 정치에도 참여했던 사회주의자인 토레 뷔르거(1807-1869)의 네덜란드 미술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베르메르를 미술계의 수면 위로 떠올려 놨다.

1866년 파리에서 옛 거장들의 작품을 모은 대규모 전시가 열렸고, 그 중 베르메르의 작품 11점이 포함됐다. 토레 뷔르거는 이 전시의 기획자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였던 베르메르의 전문가로 자처하며 스스로의 명성을 높이려는 의도도 내재했다. 화상으로도 일을 했던 뷔르거에게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잊혀진 화가를 재발견해내고, 대중과 미술계의 관심을 끌어올린 후 작품의 가격이 뛰면 자신의 부를 축적할 수 있을 것이란 셈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뷔르거는 세상을 떠났고, 수년이 지난 후에서야 베르메르의 작품 가격은 치솟기 시작했다. 베르메르의 명성에 비해 작품 수는 턱없이 부족했고, 수요와 공급의 원리로 따져봤을 때 작품가격은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베르메르의 그림들은 완성작이 40점에도 못 미쳤고, 그나마 작품도 다 작은 크기의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그림들이 뿜어내는 빛은 그 어떤 작품들보다도 더 찬연했다.

베르메르의 명성이 높아진 데는 세기의 위작사건도 큰 몫을 했다. 법정에서 위작을 증명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까지 했던 한 반 메헤렌(Han van Meegeren·1889-1947)의 행각은 그야말로 세기의 위작행각이었다. 1945년 5월, 나치의 실력자였던 레르만 괴링의 아내가 거처하던 성에서 베르메르의 작품이 발견되고 네덜란드는 발칵 뒤집혔다. 네덜란드의 진귀한 작품들을 당시 적국이었던 독일에게 팔아넘긴 죄로 추궁을 당하던 한 반 메헤렌은 결국 스스로 위작임을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결국 그는 법정에서 그림을 그려 이를 증명했다. 그림을 팔아넘긴 매국노라는 비난은 적국을 속인 국민적 영웅이란 찬사로 바뀌었고, 결국 위작에 대한 실형 1년 선고받게 된다. 하지만 메헤렌은 형을 채 마치지 못하고 죄수 전용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메헤렌의 위작행각은 미술사의 획을 그을 만큼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후로 베르메르의 작품은 위작과 도난이라는 아트 테러에 자주 휘말렸다. 1970년대, 80년대에도 또 2000년 즈음에도 아트 테러는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연애편지’ 작품은 캔버스 틀에서 무참하게 찢겨나가기까지 했다.

유독 베르메르의 작품에 따라붙은 아트테러와 같이 그의 삶도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21살이 되던 해 베르메르는 네덜란드 델프트의 길드에 가입하며 본격적으로 화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6년여의 수련기간을 생각하면 청소년기인 15세 정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21살부터 화가로 활동할 수 있었다. 21세에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활동과 함께 결혼생활도 시작했다.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베르메르는 아내인 카타리나의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그리고 20여년의 결혼 생활동안 15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 중 넷은 어려서 죽었고, 11명의 자녀를 부양했다. 당시 네덜란드 가정의 평균 자녀는 두 명이었으니, 이들의 삶은 팍팍할 수밖에 없었다. 꼼꼼하게 그림을 그렸기에 일을 병행하며 그림을 그리기엔 작품 제작의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고, 일 년에 겨우 두세 점 정도를 완성했으며 후원가나 애호가에게 판매를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열한 명의 자녀를 부양하기엔 작품에 전념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베르메르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여관도 경영했고, 그림을 파는 화상으로도 일을 했다. 40세 즈음부터 꽤나 능력 있는 화가로 인정받긴 했지만, 삶은 여전히 곤궁했고 때론 생계를 위해 상당한 액수의 대출을 받기도 했다. 한때 호황이었던 네덜란드
요하네스 베르메르 作 ‘회화의 기술, 알레고리’
의 미술시장은 프랑스와의 전쟁 등을 겪으며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가난한 화가였던 베르메르는 더욱 궁지에 몰렸고, 결국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1675년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열한 명의 자식과 부인을 남기고 말이다. 부인 카타리나는 베르메르가 죽고 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의 유작들을 팔 수밖에 없었다. 사위의 빚을 갚아주지 못하겠다는 어머니에게 카타리나는 베르메르의 마지막 유작을 넘겼다가 다시 법정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되찾을 수 있었다. 베르메르뿐 아니라 그의 작품들도 돈 앞에 무릎을 꿇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베르메르의 고단하고 곤궁했던 삶과 수차례의 위작, 도난이라는 아트테러와 달리 베르메르의 그림엔 따스한 빛이 가득하다. 특별한 무언가가 등장하지도 않고, 거친 감정의 소용돌이가 표출되지도 않는다.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만이 담겼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 물병을 든 여인, 음악 수업 등과 같이 그저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 그리고 그가 평생을 떠나지 않았던 델프트의 소박한 풍경들이 그려졌다. 헌데, 작품에 등장하는 평범한 일상의 장면을 채운 인물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베르메르는 누구를 모델로 그리고, 또 어떤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을까. 아내인지 딸인지, 혹은 집의 일을 봐주던 하녀인지 알 수 없다. 누군가는 곤궁했던 베르메르의 삶에서 모델을 구할 수는 없었고 가족들을 그렸을 것이라고도 한다.

많지 않은 작품 중 유독 수수께끼같은 그림, 도대체 누구인지 끝없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소녀의 존재를 알 수 없기에 더욱 신비롭고도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당시 이색적인 동방의 문물이었던 터번을 두르고 고개를 돌린 소녀의 모습. 마치 금방이라도 말을 걸어올 듯 소녀의 모습은 생동감이 넘친다. 그 매혹적인 모습은 현재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으며 영화로도 제작이 되기까지 했다.
문희영 <예술공간 집 관장>

열한명의 자녀와 아내,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에도 베르메르는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나갔다. 생활의 곤궁함은 작품 안에 스미지 않고 작품의 바깥으로 밀려났다. 가족의 따뜻한 사랑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베르메르의 또 다른 이면이 존재하는 것일까. 어찌 되었든 사후 200년이 돼서야 재발견된 거장의 작품은 삶의 가장 평범한 일상을 가장 소중하게 느낄 수 있도록 이끈다.

천천히 차근하게 일궈간 붓자국은 따스한 빛으로 세상 가장 평범하고도 안온하게 삶을 감싸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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