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휴가는 몇 권의 책과 함께 전통 방식으로 집에서 시원하고 알차게 보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유례없는 폭염으로 책 한권 변변히 읽지 않고 결심의 배반만 실천했다. 대신 가까운 공연장을 찾아 창조적 자장이 예술적 풍경이 되는 경제적 여행을 즐겨 보기로 했다. 빛고을시민문화관이 기획한 넌버벌 국악 퍼포먼스 ‘선앤문’을 관람했다. 감동하며 호응하고 박수를 치며 마음 속 본성이 흥겨워지는 행복한 충격이었다.

넌버벌이란 대사가 없이 주로 몸짓과 소리만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공연이다. ‘썬앤문’은 최근 국악과 월드 뮤직으로 공연에서 ‘블루칩’ 기획자로 떠오르고 있는 박칼린이 연출을 맡아 더욱 관심을 끌었다. 전통 국악, 락, 팝, 일렉트로닉이 어우러진 환상의 무대는 가야금과 아쟁의 연주자가 홀로그램 영상의 신비한 배경을 바탕으로 관객들의 시선과 귀를 사로잡으며 시작됐다. 아름다운 색감의 전통의상과 국악기의 선율은 통제할 수 없는 친밀감으로 다가왔다. 화려한 영상 홀로그램 속의 연주는 빛 속에 빛이 아주 잘디 잔 비늘처럼 온 몸을 향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악기에서 흐르는 소리와 연주자의 발걸음, 몸놀림이 연결되며 무대는 ‘넓힘과 닫힘’의 거칠고 부드럽고 높고 낮음의 예술적 표현으로 가득 찼다. 추상이 아닌 지극히 구체적인 젊은 연주자들의 폭풍 같은 연주는 국악에 대한 섣부른 해석을 거부하는 새로운 창조였다. 몸과 악기, 춤과 소리, 영상의 지향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계절의 색감이 번갈아 흐르는 ‘썬앤문’이라는 제목처럼 자연으로 회귀하는 전통국악의 어떤 원형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상상’(想像)이란 말은 코끼리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중국 사람들이 인도에서 온 코끼리뼈만 가지고 ‘코끼리의 형상을 머릿속으로 그렸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러나 ‘코끼리뼈’만으로는 온전히 살아 움직이는 코끼리를 상상하기 힘들다. 그 위에 살을 붙이고 코끼리를 일으켜 세운 뒤 걷게 만드는 힘은 온전히 ‘예술적 상상력’의 몫이다.

‘썬앤문’은 태양과 달빛의 섬세한 영상, 바다 속 풍경을 들여 놓은 화려한 배경들, 일상의 도구를 활용한 소리의 신비와 그것들과 반응하는 가야금 대금 해금 장구 그리고 무용, 특히 오고무의 유려한 움직임이 절로 예술적 상상력을 불렀다. 나를 비롯해 주변이 참 많이 경직되어 있다. 그래서 가끔 공연을 보며 공감과 회복이라는 치유에 빠져본다. 공연 중 무대에서 싸리비, 알루미늄 판, 콩, 라면봉지 등으로 바람, 벌레, 비, 풀 등 자연의 소리를 만드는 폴리 체험을 했다. 사실, 우리를 키운 건 8할이 자연의 소리다. 그래서 저 소리에는 우리들 푸른 영혼이 담겨있다. 이렇게 가슴을 뛰게 하는.

전통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는 어디일까? 연출자 박칼린은 관객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그들이 듣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공연 도중 연주자들은 객석으로 뛰어나가 관객과 노래하고 눈을 맞추었다. 소통이고 호흡이다. 관객은 이만큼의 거리에서 행복한 충격에 휩싸였다. 공자왈 “들은 것은 잊어버리고, 본 것은 기억만 되고, 직접 해본 것은 이해가 된다”고 했다. 관객들의 행복한 표정에서 아마 그들 중 누군가는 돌아가서 장구채를 두드리고 혹은 가야금, 징, 춤사위 등을 흉내내보지 않았을까.

퓨전 국악을 우려하는 시선이 없지 않다. 국악계는 이 시점에서 관객의 요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광주에도 최근 젊은 국악인들을 중심으로 퓨전 국악연주 팀들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국악이 많은 이들이 즐기는 음악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국악이 생명력을 오래도록 가질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