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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향기 가득한 헌 책방 골목
이경수
본사 경영사업본부장

2016. 10.17. 19:54:43

필자는 최근 부산을 다녀왔다.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광주국어교사모임에서 진행한 부산문화기행에 동행했다. 공부하는 교사들의 모임답게 문학관 순례(요산문학관·추리문학관)에 이어 ‘논어’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배병삼 교수의 강의가 이어지는 1박2일 일정의 알찬 프로그램이었다. 공자의 말씀처럼,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얼굴에 쓰인 배 교수와의 흐뭇한 만남을 뒤로하고 첫날 저녁은 부산에 가면 한번쯤을 들러보고 싶은 국내 최대의 수산시장이자 경상도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자갈치 시장에서 마무리했다.

다음날 여정은 부산근대역사관을 기점으로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의 애환과 향수가 담겨 있는 40계단문화의 거리, 부산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타워가 있는 용두산공원, 최근 영화의 흥행으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는 국제시장 등을 자유롭게 둘러보는 것으로 짜여졌다.

이번 여정에서 필자가 가장 감동하고 부러워한 부산의 속살은 보수동의 헌 책방이었다. 좁은 골목길 양쪽에 줄지어 자리잡은 헌 책방을 기웃거리면서 문화의 멋과 향기에 취했다.

국제시장 입구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는 헌 책방의 역사는 70년이 넘었다. 8·15광복 직후 오늘날의 국제시장이 태평양전쟁으로 주택가가 철거되면서 빈터로 놓을 있을 때 일본인이 남기고 간 책을 파는 난전이 형성됐다. 이후 이 곳의 땅과 건물들을 개인들이 소유할 수 있게 되자 책장사들이 한 두사람씩 자리를 옮겨 앉게 되면서 지금과 같은 책방골목이 만들어졌다.

6·25전쟁은 헌 책방이 더욱 활성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당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됐을 때 전쟁으로 생활고에 시달린 피난민들은 자신이 가져온 귀중한 책을 내 놓았고 전국에서 피난 온 대학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이 곳으로 와 필요한 책을 구했다. 수요에 맞춰 공급이 늘어나면서 헌 책방 골목의 규모도 덩달아 커졌다. 헌 책 중에서 가끔 진귀본이 나오면서 이 곳을 찾는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60년대 들어서도 출판문화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던 터라 헌 책은 학생과 지식인들에게 소중한 대상이었다. 중·고생들과 대학생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이 곳에만 70여개의 헌 책방이 성업했다.

이렇게 생겨난 보수동 헌 책방골목은 지금 전국적으로 몇 안되는 책방골목 가운데 가장 활성화한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헌 책방 산책은 추억으로 가는 낭만열차를 타는 기분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어쩌다 볼 수 있었던 ‘어깨동무’에서부터 야구만화의 대명사인 ‘독고탁’이 반갑게 맞이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온통 책을 쌓아 놓으면서도 한 켠에는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독서카페도 마련해 놓았다.

헌 책방 주인들은 해마다 보수동 책방골목문화행사를 열고 있다. 도서무료교환, 고서전시회, 음악회 등 행사는 시민들의 호응 속에 진행된다. 책방골목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켜 국내외 관광객 유치 및 지역상권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에도 이러한 헌 책방 거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의 광주고를 중심으로 계림동 거리 큰 길을 따라 400-500m 거리에 헌 책방들이 즐비했다.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필자도 가끔 그 곳을 찾았었다. 빈약한 호주머니 사정으로 제 값 주고 선뜻 신간을 살 수 없었기에 헌 책이라도 잡기 위해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인쇄문화가 발달하고 가계경제 상황이 나아지면서 헌 책을 찾는 수요가 줄어들게 되자 하나 둘씩 문을 닫았다. 지금은 띄엄띄엄 영업을 하고 있지만 발길은 뜸한 실정이다.

이곳을 떠나면서 필자는 광주의 상황과 오버랩되면서 아쉬움이 교차했다. 관심과 사랑만 있었다면 명소로 육성할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어디서나 ‘정신’을 강조하는 광주에서 사색의 근원이 될 귀중한 자산을 스스로 버린 것 아니냐는 질책도 뒤따랐다.

문화의 깊이는 건물을 높이 올린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문화전당을 최신식 최첨단으로 꾸민다고 문화의 질이 하루아침에 달라질리 만무하다. 지금 갖고 있는 것부터 소중히 다룰 때 문화의 깊이는 더욱 깊어진다.

부산 보수동의 헌 책방골목은 이같은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교과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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