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Mr) 스마일’이라는 별명이 상징하듯 온화한 성품의 정세균 국회의장이 5일 본회의 개회에 앞서 웃음기 없는 얼굴로 “본인의 개회사에 대해서 여당의원들이 여러 지적을 해주셨는데 거기에 대해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정 의장은 “추경안 등 민생현안이 당초 여야가 합의한 날짜에 제때 처리되지 못한 것에 대해 의장으로서 국민께 송구하고 유감스럽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로써 지난 1일 정기국회 개회사에서 정 의장이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문제 등을 언급한 이후 친박계(친박근혜)·비박계를 망라해 입에 게거품물고 달려들던 새누리당의 이상한 호들갑은 일단락됐다.

새누리당의 이상한 호들갑

당시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정 의장의 개회사는 새누리당이 이런 식으로 반발하고 이런 식으로 (국회 의사일정 전면거부를) 할 것으로 알고 한, 뻔히 계산된 도발”이라며 강도 높게 비난한 바 있다. 야당을 겨냥해서도 “국회 의석수만 많아도 국민이 안중에 없는 사람들이 국가권력을 가졌을 때 그 힘을 어떻게 쓸까 생각하면 끔찍하다”며 치를 떨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5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직후 언제 그랬냐는 듯 본회의장 뒤쪽에 있던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와 국민의당 박지원 대표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 대표 뿐 아니라 경호원의 멱살을 잡았던 한선교 의원도 해당 경호원에게 깍듯이 사과하고 “자숙하겠다”며 머리를 숙였다.

이날 행동으로만 봐선 이들이 국회의장 사퇴하라며 악을 쓰던 사람들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얻었기에 이처럼 깨끗이 사태 수습에 들어간 것일까? 며칠 사이에 갑자기 이처럼 태도가 돌변한 것은 “여당의원들의 지적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의장의 사과가 새누리당 의원들의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었을까?

국회의장의 정기국회 개회사 파문이 일어나기 전 정치권 최대의 관심사는 조윤선·김재수 장관 후보자 청문회였다. 특히 김재수 후보자의 경우 부동산 취득과정에서의 각종 비리 의혹 등으로 여권 내부에서조차 낙마 우려가 나오는 시점이었다.

당시 미확인 정보로는 청와대에서도 김 후보자가 낙마할 경우에 대비해 새로운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후보자 검증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편으론, 김 후보자는 경북 영양 출신으로 경북고와 경북대를 졸업한 뼈 속까지 TK(대구·경북)인 인물로 정·관·언론계를 막론하고 상당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어 권력의 핵심에서 어떻게든 그를 살려낼 것이란 추측도 제기됐다.

그러던 중 갑자기 상식수준의, 그것도 여권의 입장을 나름 배려한 국회의장의 우병우 및 사드 발언을 문제 삼아 새누리당이 집단으로 국회의장실을 점거하고 험악한 분위기를 만드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결과 국민들과 언론의 관심은 일거에 ‘국회의장’ 쪽으로 쏠리고 말았다. 조윤선·김재수 후보자에 대한 부적격 사유를 하나하나 밝혀가며 국민들의 관심을 이끌었던 야권도 이때부터 국회의장 개회사로 촉발된 황당하고 새로운 전선에 화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여론 호도분야’ 금메달 감

국민들과 야권의 관심이 국회의장 쪽으로 몰려든 사이 조윤선·김재수 후보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슬그머니 장관에 임명됐다. 지난 20대 총선을 통해 국민들이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주었지만, 전이나 지금이나 결국 국민이나 야권이 아니라 청와대가 원하는 방향대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것이다.

물론 야권은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제출키로 했지만, 언제나 그래왔듯 박 대통령이 야권의 목소리를 경청할 것 같지는 않다.

정치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만일 누군가가 “조윤선·김재수 낙마하면 안 되니까 어떻게든 만들라”고 주문하고, 그 주문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이번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라면 이번 해프닝의 주역들은 ‘장관 청문회 여론 호도분야’ 금메달감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해프닝에서 주목되는 것은 또 하나 있다. 새누리당 내 친박이건 비박이건 내년 대선에서 대권을 가져오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판단하면, 이들은 똘똘 뭉친다는 사실이다. 친박계 조원진 최고위원이 먼저 본회의장을 들락거리며 친박계 의원들의 집단 퇴장을 유도하자, 친박계와 사사건건 대립해온 김무성 전 대표마저 자파 소속 의원들의 퇴장을 거들었던 것이다.

국회 주변에서는 “사실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인 친박계·비박계가 이처럼 일치된 모습을 보인 이유는 사드 문제가 거론됐기 때문”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런 분석을 내놓는 이들은 내년 대선에서 사드 문제가 여전히 보수를 결집시킬 핵심적인 기제로 작동할 것으로 본다. 보수의 재집권에 도움이 된다면 친박·비박은 평소 피터지게 싸웠더라도, 언제든 함께 할 수 있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단 맛을 잘 아는 집단만이 가능한 행동양식이다.

이와 달리 진보는 집권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도 언제든 갈라설 수 있는 집단이다. 과거 김대중·김영삼이 그랬고, 근자에는 문재인·안철수가 그랬다. 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의 분화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 진보세력의 분열은 아예 정치적 DNA가 돼버린 느낌이다.

집권을 위해서라면, 각 계파간 불편함과 미움은 언제든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집단. 이와 달리 집권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조그만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갈라서는 집단. 호남 주도의 정권교체란 ‘꿈’이 여전히 실현 가능성을 높이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jskim@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