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는 화려한 꽃을 피우지 않는다. 벌과 나비의 시선을 끌 필요 없이 바람을 타고 자가수분하는 까닭이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피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벼꽃은 외면당하기 쉽지만, 사실 그 어떤 꽃보다 특별하다. 사람을 먹이고 살리는 ‘밥꽃’이기 때문이다. 이삭은 벼의 꽃다발이고, 그 속에 감춰진 벼꽃은 우리 밥상 위 쌀밥의 시작이자 생명의 출발점이다. 쌀 한 톨에는 볍씨가 견뎌낸 자연의 시간과 땡볕 속에서 풀과 싸워낸 농부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출판 편집자로 일하던 저자 김혜형의 산문집 ‘꽃이 밥이 되다’(목수책방刊)가 출간됐다. 벼를 따라가며 기록한 이 산문집은 우리가 매일같이 먹는 ‘밥’이 어떤 자연의 흐름과 인간의 손길 속에서 빚어지는지 섬세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스스로를 ‘노동하고 관찰하고 기록하는 사람’이라 말한다. 농사의 ‘농’ 자도 몰랐던 저자는 어느 날, 삶을 재배치하듯 몸을 흙으로 옮기기로 결심한다. 그 선택은 단발성 체험이 아닌, 20년을 이어온 농부의 삶으로 뿌리내렸다.

현재 그는 스물일곱 마지기 논을 일구며, 자연의 순리를 따라 흙일을 하고 글을 쓴다. 도시와 농촌, 일과 기록을 오가는 그의 삶은 긴 시간 쌓아올린 생활의 기록처럼 느껴진다.

볍씨가 잠에서 깨어 싹을 틔우고, 못자리를 거쳐 모내기를 지나 이삭을 맺기까지. 장마와 폭염, 병충해와 태풍을 견디며 결국 한 알의 쌀알로 여물어 밥상에 오르는 과정이 한 해의 사계와 맞물려 펼쳐진다.

책에는 농사일의 고단함도 숨김없이 담겼다. 저자는 농약과 제초제를 쓰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힘든 일은 풀을 다스리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제초제를 뿌려 손쉽게 풀을 제거하기보다는, 땅에 잠시 발 딛고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고자 한다. “작물을 건강하게 키워서 우리와 연결된 이들을 먹이고 싶다”는 저자의 바람은 땡볕 아래서 허리를 굽히는 노동을 견디게 하는 이유다.

그러한 농사의 자리는 인간만이 주인이 아니다. 논둑의 청둥오리 둥지, 거미줄에 맺힌 이슬, 고라니 발자국, 때로는 멧돼지의 흔적까지, 생명과 함께 살아가는 감각이 글 곳곳에 묻어난다. 책 말미에는 추수 후 빈 논에서 꿀벌들이 쌀겨를 야금야금 퍼 나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도 생명의 연속은 이같이 이어진다.

저자는 “이 책은 매일 밥상에 올라오는 쌀밥의 서사이자 논물에 발을 담그고 사는 농부의 분투기”라며 “이 땅에서 앞서 살다 간 이들의 생명이 우리 몸으로 이어지고, 우리 논에 번성했던 곡식의 생명은 우리 밥으로 이어진다”고 밝혔다./최명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