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선(禪) 사상의 바탕은 연기론(緣起論)이다. 우주 속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본질은 원래 텅 비어 있으며 그 정체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가 아니라 언제나 비어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한한 삼라만상들이 흩어져 자유로이 떠돌다가 인연(因緣)에 따라 존재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서로 인연에 따라 인드라망 구조로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것이 연기법(緣起法)이다. 다시 말해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그 자체로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인연으로 인해 생성되고, 인연으로 인해 발전과 변화를 거쳐 인연으로 인해 사라지기 때문에(生老病死) ‘인연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의미로 불교에서는 이것을 공(空)이라고 정의한다. 이 공(空)에 대해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물질이 곧 공(空)이요, 공(空)이 곧 물질이다’는 뜻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개나리’ 하면 우리는 관념적으로 봄철 노란 빛깔로 예쁘게 핀 ‘개나리꽃’만을 떠올리고 개나리의 나뭇잎과 줄기, 뿌리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더군다나 인간과 개, 고양이, 매화 등과 같은 다른 사물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개나리꽃은 개나리 나무의 잎도 줄기도 아니다. 가지가 없다면 가지 끝에 개나리꽃이 필 수 없다. 또 가지는 줄기에서 영양분을 공급받아 성장하므로 줄기 없이는 가지가 있을 수 없다. 또한 줄기는 뿌리에서 빨아올린 수분과 영양분, 잎의 광합성작용 덕분에 존재한다. 따라서 개나리꽃은 가지와 잎, 줄기, 뿌리와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봄철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또한 뿌리에서 흡수한 수분과 영양분, 그리고 잎에서 광합성작용으로 얻은 영양분이 가지와 줄기를 통해 이동하지 않으면 꽃을 피울 수가 없다.

하여 대지와 물과 태양과 공기가 없으면 개나리꽃은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개나리꽃이 떨어지면 땅속 미생물들의 먹이가 되고 그것은 분해되어 흙이 된다. 흙이 된 영양분은 매화나무와 감나무 뿌리가 빨아들이면 원래 개나리꽃이었던 물질의 일부가 매화와 감의 일부로 변한다. 옥수수 뿌리가 빨아먹으면 옥수수의 일부가 되고 그 옥수수를 쥐가 먹으면 그 물질은 쥐의 일부가 된다. 그 쥐를 고양이가 잡아먹으면 고양이의 일부가 되고 고양이가 죽으면 다시 미생물의 영양분과 흙으로 변하는 등 우주 속의 자연생태계에서는 끊임없이 일련의 먹이사슬을 통해 순환하게 된다.

이 먹이사슬이 형성되는 것은 개나리꽃과 풀, 쥐, 고양이, 미생물, 흙 모두 같은 지구상에 존재하고 그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구에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태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태양은 태양계가 관계하고, 태양계는 은하계 우주 전체가 관계한다. 그러므로 개나리꽃은 전 우주의 작용과 현상의 관계 속에서 인연으로 연결됨으로써 피어날 수 있다.

따라서 한 송이의 개나리꽃은 그대로 우주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이렇듯 우주의 삼라만상은 하나하나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물질은 다른 물질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정 기간 나타났다 사라지며, 그 생멸(生滅)은 끊임없이 이어진 전체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주의 본질이 진공묘유라는 사실과 우리가 무상(無想)과 무아(無我)를 깨닫지 못하면 삶의 모든 것이 괴로움이고, 그것을 깨닫게 되면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현대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재테크’를 삶의 가장 중요한 척도로 여기며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 하지만 행복이란 재화의 양과 결코 비례 하지는 않는다.

1760년에서 1830년경까지 약 1세기에 걸쳐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우리의 사고와 생활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종래의 가내 수공업에 의한 소규모의 소량 생산은 기계의 등장으로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전환됨에 따라 산업사회의 일대 혁신을 가져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은 산업혁명은 농경사회를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미덕인 산업화와 도시화로 재편되면서 현대인들의 생활은 비약적으로 편리해졌다. 그러나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사회적 모순을 가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산업화에 따른 환경파괴는 엄청난 재앙이 되어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때문에 소위 문명화와 산업화가 발달한 나라의 국민일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국민 행복지수는 낮게 나타나고 있다.

재화는 결코 우리의 행복 충분조건이 되지 못하고 있다. 첨단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행복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은 재테크가 아니라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인연(因緣)으로 맺어진 ‘휴먼테크’가 아닐까?.

나는 오늘도 내 인생의 또 하나의 행복 충분조건 마련을 위해 그대와의 관계를 맺는다.

<라규채 약력>
▲현대문예 신인상 등단
▲광주문협 회원
▲대동문화재단 이사
▲포토에세이: ‘하늘을 나는 새는 뼛속까지 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