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새로운 한해가 시작된다. 아쉬움과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를 준비한다. 청소년기에는 배우면서 꿈을 꾸는 시기다. 결혼해서는 자식들을 키우고 가족을 이끌기 위해서 산다. 수십 년을 절약하며 집 한 채 마련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퇴직을 하고서 자식들이 결혼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위한 인생이 시작됐다. 이순에 이르러 나를 위해서 살아도 되는 시기가 됐다.

대학 1학년 때 비상계엄과 1980년 5·18 비상계엄을 경험했다. 그리고 지난 3일에 또 상상도 못한 비상계엄을 다시 겪게 됐다. 길 위에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강인한 항쟁을 보았다. 1980년에 죽은 자들이 2024년 산자들을 구했다. 역사는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축적된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완성돼 가는 것을 확인한다. 그렇게 정치적, 경제적 격변기에 열심히 살고 보니 지금의 내가 서 있다.

불혹의 나이에는 정체성에 대한 갈등이 심했다. 거기서 탈출하기 위해 홀로 유럽 여행을 떠났다. 처음으로 타는 비행기였다. 외국 여행을 하면서 산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유로운 삶을 보게 됐다. 우리는 산 위에 사는 것은 달동네라 부르는데 유럽은 달랐다. 산에서 사는 삶이 가난이 아니라 낭만과 여유로움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유럽 여행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변곡점이 됐다. 충격이었다. 그 이후 어떤 어려운 여건에서도 여유로움과 멋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내가 여기에 서 있는 것이다. 여행에서 꿈꾸었던 시골 산위에서 사는 삶을 위해서 20년 전에 땅을 구입하고 12평 집을 지어 10년째 살아가고 있는 것도 그것이다. 세월이 지나가 이순을 넘긴지가 오래됐다. 이제 또 다른 꿈을 찾으며 순간을 즐기고 있다. 지금의 노년이 좋다. 지붕 기와 틈 사이에 들어와 세들어 사는 참새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마저 같은 마음인가 싶어 소음이 아니라 정겹게 들린다.

그동안의 생활들이 하나씩 정리돼 간다. 정리해야 할 두려움과 욕망에 대한 대처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험에 가입하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영양섭취와 운동을 한다.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잎새가 바람에 떨어져 낙엽으로 굴러가듯이 주어진 수명이 다 되면 그대로 지면 된다. 단지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산소기를 꽂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한다.

세상에서 제일 공평한 것은 죽음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겸손한 생각으로 오래 사는 것보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지 삶의 의미를 찾으면 된다. 젊음의 욕망은 무한하지만 나이듦의 욕망은 소박해진다. 사회생활에서의 지위는 경제적인 힘에 의해 좌우되기에 돈을 모으기 위해서 노력한다. 수 십년의 노력으로 집 한채를 마련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한다. 퇴직 후 노년은 주어진 것에서 만족을 찾아야한다. 가벼운 욕망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주위를 돌아보면 내 욕망을 부추기기 위해서 모든 것이 춤을 춘다. TV에서는 나를 유혹하는 광고로 가득차 있다. 주위의 많은 욕망을 이해하고 나를 유혹하는 욕망에 절제한다.

호화로운 술자리도 좋지만 멋있는 벗과 나누는 한잔 술을 즐기며 벗이 바쁘면 혼술로 취기를 느끼면 된다. 심심하면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사람구경도 하면서 독서와 사색을 즐기면 된다. 여유있으면 낯선 곳으로 설레이는 여행을 떠나면 된다. 퇴직하면서 모두가 걱정하는 것은 돈이다. 돈 때문에 살아온 삶이기에 모든 게 돈에 달려있다 생각한다. 돈은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 일뿐이다.

돈 보다는 마인드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주어진 환경에서 나름대로 즐거움을 찾으면 된다. 김치 한조각에 막걸리 한잔으로 취기를 즐기면 된다. 분위기 좋은 카페도 좋지만 주변에 널려있는 자연 속에서 준비한 차 한잔은 어떠한가. 살아있음이 좋다. 그 좋은 세상을 어떻게 즐겨야 할지는 나에게 달려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기면 된다. 다가오는 인연을 이어가며 좋은 만남을 찾아 나선다. 새핸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이 많은 노년을 즐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