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예년보다 조금은 빨리 다가온 추석 명절이었지만 입꼬리에 차오르는 즐거움은 숨길 수가 없었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친척들과 한 데 모여 맛있는 음식도 먹고 오랜만에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명절은 늘 즐겁기 그지없는 시간인 것만 같다.

추석의 묘미로는 푸짐한 음식들도 있겠지만 둥그렇게 뜬 달을 보며 소원을 빌어보는 일도 뺄 수가 없다. 소원을 이뤄준다는 말이 사실은 아니겠지만 일탈을 꿈꾸는 우리에게 이 시간은 기분 좋은 에피소드가 돼 줄 수 있을 것이라서 보름달을 기다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가는 보름달처럼 동그란 달항아리를 사랑했던 김환기 화백이다.

추상회화의 대가로 불리며 국내 작가 중 옥션가 최고치를 갱신한 화가이기도 한 김환기는 작품 초반 사물의 형태가 드러나는 구상형식의 그림을 그렸었고 달항아리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다. 하늘에 뜬 별을 점으로 화폭에 새겨 넣었던 후기 추상작품 이전 그의 초창기 작품에서 살필 수 있던 소재가 바로 ‘달항아리’였다.

김환기 作 ‘자화상’ <위키피디아 검색>

작품 ‘정원’에서 보면 달항아리와 매화 사이로 샛노란 보름달이 둥실 떠 있다. 화면 한가운데 뜬 달은 하늘인지 땅인지 모를 곳에 완전한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고 달항아리처럼 처연하게도 떠 있다.

‘비어있으면서도 동시에 꽉 찬 격조있는 전통미’는 달항아리의 독특한 형상미와 함께 문기(文氣) 어린 매화가 어우러지며 그 진가가 배가된 듯하다.

백자를 정원에 두고 감상하는 일을 즐겨 했던 화백의 심경이 담긴 작품 속에는 화가의 반대편에 나란히 선 채로 시선을 응시하는 두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과연 보름달인가? 아니면 백자일까?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라는 이야기를 수필에 기고할 정도였던 그는 마지막 전면점화가 완성되기까지 끊임없이 조형 변화와 재료적 실험을 했다. 한국적인 정서가 묻어나는 소재에 대한 연구 또한 함께 병행했던 시기인 1956년 작인 정원은, 그가 미국으로 가기 전 잠시 프랑스에서 머물 당시 작품으로 한창 한국적 모티프에 대한 농도가 진해지던 시기였다.

이와 같은 시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자 늦은 나이 도전했던 미국 유학 초반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이후 10년간 미국 생활 중 그의 화폭에는 큰 형상적 변화가 찾아오는데, 안정적이던 교수직마저 물리고 가 닿은 곳은 그에게 큰 시련을 줬지만 더욱 큰 성취도 맛보게 했다.

한국적인 소재들의 탐닉 이후에도 점진적인 발전을 꿈꾸었던 화백의 종착지는 이전의 모든 액기스들을 응축함과 동시에 당시 미술계의 흐름 위에 닿으며 추상을 향해 갔다.

그를 세계적인 화가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은 이 시기 밤하늘에 뜬 별들을 점으로 화폭에 하나하나 담아낸 추상화였다.

그렇지만 뭐든 쉬운 일은 없다.

고향을 떠나온 일,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할수 없는 외로운 일상, 하루 24시간 캔버스 앞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하는 그 지리한 시간들은 말이 그렇지 정말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시간은 버티게 해준 것 중 가장 큰 원동력은 자신의 아내였던 김향안이었음을 모르는 독자는 없다. 그렇지만 그녀의 소금 같은 따스한 조력도 결국 스스로가 버티지 못했다면 한낱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일반적으로 작가들이 작품을 제작할 때 작품을 구상하는 작가노트를 작성하는 일이 빈번하다. 이에 더해 화백은 일기를 작성해왔다.

독자들도 일기를 써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한 번쯤은 어린 시절 방학 과제로 잔뜩 밀린 그림일기를 써봤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최대한 단숨에 끝낼 수 있는 소재로 여름에 가지도 않은 해수욕장이며 하지도 않았던 곤충 채집 등 다양한 에피소드를 한데 몰아쳐 거의 소설책 수준의 일기를 완성해냈던 일들은 지금 생각해봐도 어렸지만 대단했던 것 같지 않은가?

쓰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었는가? 당시는 매우 불편한 숙제였지만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느 순간은 일기 쓰기가 절실해지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더라.

하루를 되돌아보고 다시 복습해 보기도 하고 세상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 중 발생한 여러 감정들을 스스로 추스를 수 있게 하는 힘을 갖게 한 원동력이 돼 주기도 했다.

이렇게 하루를 담아내는 일기장의 매력은 아마도 독자와 필자가 하나라는 것이 가장 큰 포인트라 하겠다. 세상에서 가장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글쓰기로 글쓴이의 거의 분신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일기가 아닐까 싶다.

김환기 화백도 일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대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의 일기는 바로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와도 같은 것이었을 테다. 일기 속에 고스란히 담긴 그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담긴 기록들을 보면 알수 있다.

나는 술을 마셔야 천재가 된다.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는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 (1971.1.27.) 서러운 생각으로 그리지만 결과는 아름다운 명랑한 그림이 되기를 바란다. (1972.9.14.) 새벽부터 비가 왔나 보다. 죽을 날도 가까워 왔는데 무슨 생각을 해야되나.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 (1974.6.16.)

김환기 판화 ‘고요 Tranquility 5-Ⅳ-73 #310’ <위키피디아 검색>

학장 자리를 내던지고 늦은 나이 타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지만 국내와는 다른 현지 평론가들의 반응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생계를 유지할 그림 판매도 녹록치 않아 생활고에 시달리며, 캔버스 살 돈이 없어 신문지에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화폭 앞에 서서 지독히 자신과의 싸움을 시전하던 그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 내면에 비친 우주의 질서를 점을 찍어 표현한 전면점화(全面點畵)는 말 그대로 수많은 실험 끝에 탄생한 결과물이었다. 그 점 속에는 그가 사랑했던 달과 달항아리, 고향의 바다 그리고 고국의 모든 것 사랑했던 이들을 포함해 그의 온 세상이 응축된 엑기스였다.

<이현남·전남대 강사>

첨부된 판화작품 ‘고요’는 전면을 덮은 푸른색이 시원스럽게 보인다. 바닷가 출신인 그에게 푸른색은 자신을 품어 키워낸 고국의 푸른 하늘과 바다였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색이기도 했다. 그 위에 촘촘히 박힌 점들은 수많은 인연들을 마치 하늘에 뜬 별처럼 하나하나 화폭에 아로새긴 것이었다.

그 점들은 바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스쳐 갔던 모든 인연들을 회상하며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우주적 윤회의 과정을 담아낸 것이라 하겠다.

명절을 맞아 독자들 또한 오랜만에 만나는 소중한 인연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를 바라보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