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이 따스한 날, 모처럼 드라이브에 엄마는 달떠 있었다.

“야, 저그 좀 봐야. 황금이 천지다 천지. 저 잠자리들맨키 내 맘도 부자되아부렀다. 저러고 날아댕기믄 참말로 좋겄다마는.”

추수가 임박한 들판에는 고개 숙인 벼들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도시에서는 아직 푸른 은행나무가 노란 잎을 달고 햇빛에 반짝였다. 황금 카펫 위를 누비듯 활개 치는 잠자리들이 엄마는 부러운가 보았다.

“오, 우리 엄마 시인 같네.”

“아이고, 뭔 말 같잖은 소리를. 근디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육십 넘어 한글 배움서 그 소리는 참말로 많이 들었어야. 느그 아버지가 나가서 돈만 벌어다 줬어도 진즉에 글 배와서 벌써 시가 기십 마지기는 나왔을 것이여.”

행여 농군 아내 아니랄까 봐 나락도 콩도 아니고 시가 기십 마지기라니. 예전 같았으면 무식한 여편네라고 면박을 놓았을 아버지는 먼산바라기만 하고 있었다. 요즘 가는 귀가 먹었다는 엄마 말이 옳았다.

“나 바람났는가벼. 올가을은 참말로 요상해야. 어디 구멍이라도 뻥 뚫린 것맨키 맘이 허전허디허전허다. 맘 안에도 여러 칸이 있는 것 같어. 서방 방, 자식 방 따로 있고 배움으로 메꾸는 방도 있고….”

“그럼, 엄마는 뭘 배우고 싶어요?”

“내 맘 안에서 맹글어지는 말을 글로 죄다 쓰고 싶다. 서방은 걸러부렀고 글이라도 속 시원하게 풀어놔버리믄 참말로 좋겄는디….”

십여 년 전 광주에 살며 글방에서 터득한 실력으로 글자를 읽을 수는 있지만, 심중의 말을 글로 쓰기는 어려워 답답함을 느끼는 듯했다. 그마저 아픈 아버지 따라 시골로 이사하며 중단되고 말았으니 아쉬움이 컸으리라. 깊은 한숨을 내뱉는 엄마를 위해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여기가 주암호예요. 내려서 바람 좀 쐬세요.”

“오메, 주암댐이 옛날에는 바다맨키 넓었는디 잔뜩 말라부렀네. 가뭄이 심하긴 심했제. 요로고 물길이 야위믄 나무도 다 야위제. 그러믄 짐승도 야위고 사람도 야위고….”

반이 채 안 되는 주암호 수위를 한마음으로 걱정하며 웬일로 엄마는 아버지와 한동안 옛 얘기로 꽃을 피웠다.

“엄마, 아버지가 이 꽃 엄마한테 전해 달라고 하시네요.”

두 분이 대화에 빠진 사이 엮어 놓은 산국화 한 다발을 차에 오르는 엄마 앞에 놓았다.

“인자 본께 우리 딸이 거짓말을 영 잘허네. 저 양반이 그럴 위인이믄 내가 시방 요 모양 요 꼴이것냐?”

모녀의 대화에는 관심조차 없는 아버지에게 연신 눈총을 쏘면서도 엄마의 입은 벙싯벙싯 웃고 있었다.

“향이 참말로 좋다. 느그는 맘이 얼마나 고우믄 이런 향내를 뿜냐? 나는 팔십 평생 살아도 그럴 줄을 모른디.”

차 안에는 국화 향이 그득하게 차오르는데 멈추지 않던 엄마의 시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나도 따라 생각에 잠겼다. 섬진강 가에 사는 유명 시인은 자라면서 들어온 엄마의 말을 죄다 기억해 시로 썼다는데….

얼마 후 잎이 바짝 말라 허룩해진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에 이르렀을 때, 시는 다시 시작되었고 이내 절정을 이루었다.

“느그는 뭔 고생을 했간디 벌써 그리 꼬부라져부렀냐? 후년에는 더 곱게 피어나그라. 나는 인자 죽을 일밖에 없지만 느그는 또 새로 날 수 있응께….

다문다문 흔들리는 잎 사이로 가을 햇발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조자영 약력>
▲대한문학 등단
▲수필집 : ‘시들지 마라 피어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