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中乍晴(도중사청) - 연암 박지원
山腹深靑天黑色 無數白鷺飛飜空(산복심청천흑색 무수백로비번공)
頑童騎牛亂溪水 隔溪飛上美人虹(완동기우난계수 격계비상미인홍)
산 중턱은 짙푸르고 하늘은 먹장인데
무수한 흰 해오라기 공중을 날라 다녀
완동이 소를 탈 때에 무지개 솟구치네.

여름장마가 되면 쉼 없이 비가 쏟아진다. 하늘 기운이 노하여 성화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하늘의 노기는 철없이 구는 인간을 모두 집어 삼킬 만큼 기세를 부린다. [하느님! 제가 잘못했나이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그제야 뉘우치며 싹싹 빈다. 쏟아진 비가 잠시 멈추고 언뜻언뜻 햇볕이 보이면 환호성이라도 칠 양으로 반갑다. ‘산 중턱 짙푸르고 하늘은 먹빛인데, 무수한 흰 해오라기들 공중을 난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개구쟁이 소를 타고 시냇물에서 첨벙거리고(道中乍晴)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연암협에 은거하며 개성유수로 부임한 교우 유언호에게서 생활하는데 큰 도움을 받기도 했던 인물로 알려진다.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했으며,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산 중턱 짙푸르고 하늘은 먹빛인데 / 무수한 흰 해오라기들 공중을 날아다닌다 // 개구쟁이 소를 타고 시냇물에서 첨벙거리고 / 개울을 건너서 고운 무지개는 하늘로 솟구친다’라는 한 덩어리 시상이다.

위 시제는 ‘비가 내리는 도중에 잠시 날씨가 개다’로 번역된다. 이 글의 앞에는 다음과 같은 주제(主題)에 대한 부연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한 마리 해오라기 버드나무 밟고 섰고(一鷺踏柳根) / 또 한 마리 해오라기 물 가운데 서 있다(二鷺立水中)’라고 돼 있다. 해오라기가 마치 서커스라도 하면서 먹이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을 유혹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수가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는다.

시인은 비가 계속 내리다가 언뜻언뜻 보인 산이나 강을 보면 색깔이 짙푸르다 못해 먹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의 시상이 스며 나온 작품의 냄새를 맛본다. 산 중턱 짙푸르고 하늘은 먹빛을 띠고 있는데, 무수한 흰 해오라기들이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해오라기의 청정한 모습을 하면서 하늘에서 곡예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짙게 받는다.

화자의 시상은 미처 선경에 취해 더 이상 후정을 담을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음이 배어나는 작품을 보인다. 개구쟁이들 소를 타고 시냇물에 첨벙거리고, 개울을 건너 고운 무지개는 하늘로 솟구친다고 했다. 후정을 나타낼 시인의 기교를 기다려 본다.<시조시인·문학평론가 (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한자와 어구

山腹: 산 중턱. 深靑: 깊고 맑다. 天黑色: 하늘은 흑색이다. 無數: 무수하게 많다. 白鷺: 백로. 해오라기. 飛飜空: 공중을 날다. // 頑童: 개구쟁이 아이들. 騎牛: 소를 타다. 亂溪水: 시냇물이 요란하다. 隔溪: 시내를 막다. 飛上: 비상하다. 美人虹: 고운 무지개. 미인 같은 무지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