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구월의 햇살이 옴실거린다. 나비 모양으로 묶은 커튼의 끈을 풀어 방안에 침범한 햇살을 가린다. 짙은 갈색 커튼에 방안은 순식간 어둠에 잠긴다. 밝음에서 어둠으로 바뀌는 것도 순간이다. 내 감정도 늘 그렇다.

병원 나이트를 하고 아침이 돼서야 돌아온 딸은 밥숟갈을 놓자마자 침대에 눕는다. 잠든 딸애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창백하게 누워 있는 딸은 잠을 자고 있다기보다는 혼절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슴까지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주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딸애는 백의 천사 길을 걷는 병원 간호사다. 나이팅게일이나 “닥터지바고” 속의 나나 같은 막연한 간호사만을 생각했던 내게 딸은 간호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힘들고 아름다운 일을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었다. 집에서는 걸레도 빨아보지 않던 애가 중환자실에서 밤샘하며 환자들의 오물을 받아내고 인간의 귀한 목숨이 사위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해 있었다.

“엄마는 모르지? 사람의 마지막 목숨을 지켜본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를.”

햇병아리 간호사 시절 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밤낮으로 간호하며 지켜보던 생명이 꽃잎처럼 하르르 져버린 날, 벌겋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딸이 던진 말이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웬만한 슬픈 감정은 혼자서 꿀꺽 삼켜버리고 좀처럼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는 애인데.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딸애를 꼭 껴안았다. 인형처럼 작고 가냘픈 체구가 가슴에 가득 안겨 왔다.

딸애의 말이 아니라도 마음이 울적해질 때면 늘 내게 묻곤 했다. 우리는 종내 어디로 가는 것일까?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이 차오를 때면 베란다로 나와 끝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곤 한다.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소멸되어 간다. 소멸한다는 것은 이별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가장 슬픈 일이 곧 이별이 아니겠는가?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목울대가 아파오던 경험이 떠올려진다.

딸애는 생사를 넘나드는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볼에 스치는 바람이 서늘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더위가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태세로 버텼는데 어느새 구월이 가려고 한다. 시간은 늘 그렇게 흐르더니 나를 중년에서 노년의 길로 데려다 놨다. 어제 같은 날들이 오늘도 이어지는데 시간은 어느새 또 내 곁으로 와서 짓궂게 주름살을 그려놓고 도망을 간다.

여름에서 가을로 잘 건너왔음에도 서늘한 바람에 내 삶의 꼬리가 밟힌다. 상념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진다. 유한한 삶이 애잔하다. 삶을 너무 사랑하지 말아야겠다. 그러나 살아 있음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딸애가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 대신 아픔과 절망을 먼저 배워 버린 것 같아 간호대를 보낸 게 후회가 되기도 한다. 향수 대신 크레졸 냄새에 길들여 살아야 하는 것은 이젠 딸의 숙명이 되었다. 잘 버티고 나갈 것이라 생각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짠하다.

“잘 해낼 거야.” 애써 위로의 말을 던져본다.

잠든 딸애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 올려 준다. 요령을 피우지 못한 성격이라 살아가는 데 많이 힘들 것이다. 그게 간호사의 길을 가는 데 적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편으론 위로가 된다. 따지고 보면 힘든 만큼 보람도 있지 않을까. 생명을 보살피고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일에 정성을 쏟는 것은 참 귀하고 성스러운 일이다. 딸의 손길을 받은 환자들의 건강이 꽃처럼 피어났으면 좋겠다.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는 환자들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주는 밤하늘의 별빛 같은 간호사가 되기를 기도해 본다.

<이민주 약력>
▲‘수필과 비평’ 등단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한국여성문학상, 광주문학상, 영호남문학상 수상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영호남문학 회원
▲저서 : 소설집 ‘종이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