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대상 정영의 - 나의 무등산 호랑이들>

오래전 어느 날 한 지인이 말했다.

“무등산 호랑이가 죽었대.”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의 대답은

“예? 무등산에 호랑이가 있었어요?”였다.

그들 둘 다 웃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도 웃었다. 이 웃음은 무등산에 호랑이가 아직 있을 리가 없다는 무언의 동의였다. 무등산 한 자락에서 기도원을 운영하고 있던 한 은퇴 목사의 별세가 따끈따끈한 뉴스로 전해진 것이다. 아, 올곧은 성정으로 곁의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던 그분이라면 무등산 호랑이라고 불릴 만하다고 속으로 떠올린 이름, 바로 그분이었다. 큰 별이 지는 일은 일파만파의 커다란 파장을 가져오는 법이지만, 나에게는 있을 리가 없는 ‘무등산의 호랑이’라는 표현으로 기억에 새겨지는 사건이었다.

전남에 정착하면서 이래저래 무등산에 오를 일이 생기고 유독 영험이 많다는 무등산에 그분이 지으신 H수양관에도 갈 일이 생겼다. 그곳에도 기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어성경외우기 캠프에 참가하러 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도원의 설립 취지와는 약간은 비껴가는데도 흔쾌히 허락을 받았네, 싶다. 나는 그분을 알아도 그분은 나를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내 친정 부모님의 금혼식 주례를 해주신 분이다. 지인의 입을 통해 들은 그대로 그분은 나의 무등산 호랑이 제1호다.

나는 20대 후반에 광주에 처음 왔다. 1번 버스를 타고 구 도청 쪽으로 이동하면서 도심에 감도는 매캐한 내음을 처음 접했다. 충격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 독한 공기를 만날 맛보며 살 수 있을까! 광주사람들은 독해지지 않을래야 독해지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언젠가는 ‘무등산은 알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올 거야.”라고 했다. 그는 전남대 인근에서 계엄군의 곤봉에 허리를 가격당했다고 요점만 간단히 말했다. 그 말은 무심코 들어넘긴 한편,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쫓기던 이야기를 무등산의 이름으로 알려야 한다니, 광주가 곧 무등산이라는 결론이 함께 기억에 새겨졌다.

남편은 풀을 절대로 뽑지 않았다. 농촌에 몸담고 살면서 무성한 풀 무더기를 잘도 두고 보니 너무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허리가 아프다’고 했지만, 나한테는 꾀병처럼 보였고, 한번 삐끗하면 2-3주는 기본으로 누워 있어야 하는 일인 줄은 몰랐다. 그러니 5·18은 오래오래 많은 이들에게 그 후유증을 남긴 사건이었다. 피해자와 유가족은 말할 것도 없이 요즘 나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가해자들까지도 아팠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 후유증들에는 아예 축에 끼지도 못하게 평생 허리가 아팠고, 그 때문에 바가지까지 박박 긁혀야 했던 남편에게 깊이 사과하는 심정으로 나는 5·18을 앓는 이들을 나의 무등산 호랑이 제2호로 삼는다.

비(非)광주인(光州人)인 나의 5·18 조우(遭遇)는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외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젊은 백인 남자는 나의 영어 실력(?)을 살짝 떠보고 젊은이니까 공감대가 형성될 거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는 영자신문 기사를 오려낸 쪽지를 보여주며 서투른 한국어로 5·18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 언론은 통제되고 있었고, 내가 아는 5·18은 “광주에 난리가 났대. 도시가 봉쇄됐는데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한대. 폭도들이 떼로 죽어 나간대.”였다. 그런데 이 외국인이 보여주며 말하는 것은 생전 처음 듣는, 듣고 싶지도 믿고 싶지도 않은 뉴스였다. 내 반응은 이랬다. “네 말이 맞다고 하자. 설령 그랬다 해도 내 나라 일에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나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한 대 얻어맞은 듯 황급히 해명을 하러 들던 그를 나는 매몰차게 외면했다.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도 않은 나는 길고 깊게 이야기를 끌어갈 만큼 영어 실력도 안 되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정곡이 찔렸다는 사실이다. 남의 나라 사람들의 아픔까지 보듬었던 그 앞에서 정작 나는 내 나라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치부를 들킨 창피함이 나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때의 내 반응을 미안해해야 하는 일인 줄 아는 데에 40년이 넘게 걸렸다. 세상이 좋아졌다. 미안해해도 괜찮은 세상이 됐다. 괜찮은 세상이나 되니까 마음 놓고 미안해할 수 있어서 미안하다. 되지도 않는 한국어로 나에게 5·18의 참상을 전해주려고 애썼던 그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는 심정으로 나는 그를 나의 무등산 호랑이 제3호로 명명한다.

한 놈만 팬다는 말대로 5·18은 광주가 대표로 두들겨 맞는 사건이었다. 내가 전주에서 학교에 다녔을 때, 학생회장에게 소포가 왔다고 했다. 상자 속에 들어 있던 물건을, 다들 시위에 나섰는데 너네는 겁쟁이처럼 침묵하느냐는 소리라고들 해석했다. 그러고도 시위 얘기는 못 들었으니 그조차도 내가 관심이 없던 탓이었다. 5·18 당일, 전경들의 버스가 S고교 담을 포위한 와중에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스크럼을 짜고 뛰쳐나가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교장이 앞장서서 뜯어말리고 학생들을 언덕 너머 여고로 대피를 시켜야 했다고 한다. 비록 불발로 그치긴 했지만, 시내 고교 중 유일하게 시위에 나서려고 했던 S고교 학생들을 (광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나의 무등산 호랑이 제4호로 선언하려고 한다.

무등이란 ‘등급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으로, ‘비할 데 없이 높고, 등급을 매길 수 없다’는 뜻이다.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가 될 것을 내다본 이가 붙인 이름인 것 같다. 성지란 거룩한 이의 자취가 남은 장소로,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를 함께 끌어당기는 곳이다. 일례로 기독교를 믿지도 않는 요르단 국왕이 자국 영토의 한 곳을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터’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예수가 세례받은 그 시점부터 그 터가 거룩해졌고, 그 터를 흐르는 물줄기가 거룩해졌으며, 그 물에 세례를 받는 이마다 영원히 거룩해질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로마교회 교황이 왕림하여 성지로 공인했으니, 이런 식으로라면 세계가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부를 만도 하다.

일방적으로 도살을 당한 게 아니라 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다가 날벼락을 맞은 광주다. 민주화를 열망하면서 날벼락을 받은 이라면 광주를 우러러볼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5·18민주화운동이 UNESCO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그 옛날 헬기 사격의 흔적이 세계사에 영광의 상처로 기록되었으니, 비단조개의 살을 찌르던 까끌까끌한 상흔이 찬란한 무지갯빛 진주로 바뀐, 상전벽해의 대한민국을 보면서 그들은 감히 자기네 나라의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광주가 예루살렘이고, 룸비니이고, 메카이다. 비극의 무대였던 곳을 돌며 교훈을 얻는 ‘다크투어’란 여행 트랜드가 있는데, 나는 광주도 그들에게는 아우슈비츠나 킬링필드 이상의 명소일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직접 광주시티투어 버스를 탔었다. 투어의 문화해설사는 도청 앞 광장에 나를 세워놓고 당시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해설해주었다. 일촉즉발의 대치국면에서 태극기 하강시간이 되자 동작을 멈추고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이다. 누구야, 도대체, 사격 명령을 내린 놈이! 나는 화가 치밀어 이야기를 듣다 말고 꺼이꺼이 낙루를 했다! 명찰까지 달고 있던 그 해설사님의 이름을 나는 곧 잊었다. 하지만, 나를 울린 그 국기 하강시간의 참극은 기억에 깊게 새겨졌다. 바라기로는 그 문화해설사님이 나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많은 이들을 울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계속 건강하고 그 감동적인 해설을 오래오래 하시도록 그분을 나의 무등산 호랑이 제5호로 임명한다.

나의 무등산 호랑이들 이야기는 지인과의 대화에서 절정에 이른다. 지인은 수십 년차 야구팬이고 사람과 사물을 야구의 잣대로 해석하는 이순(耳順)의 여인네다. 대뜸 “무등산이라면 양현종이지.” 하더니 “언제까지나 5·18이냐! 이제는 양현종이다. 그걸 모르다니 모르는 사람이 잘못이다.”라고 언성을 높이며 자료를 들이밀었다. 양현종은 광주 MBC가 선정한 무등산 홍보대사이고, 미담이 차고 넘치니 자료만 편집해도 글이 된단다. “내가 잘 던지는 것은 무등산의 정기를 받았기 때문”이라며 무등산의 위상을 높였으니, 나는 양현종에 관해 글을 써야 하고 쓴 것을 자기에게 보여줘야 한단다!

양현종의 소속사 기아 타이거즈는 일단 이름이 호랑이들이다. 사자도 아니고 곰도 아닌 호랑이가 되기를 선택한 (기아 타이거즈의 전신 해태 타이거즈의) 사내들은 전용 훈련장이 없던 시절에 무등산을 뛰어 오르내리며 훈련했다고 한다. 등산객들을 마주칠 때마다 올라가며 인사하고 내려가며 인사하며, 만날 무등산에서 뛰던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무등산 호랑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정권이 광주인들의 모임을 견제한 탓에 광주팀은 해마다 5·18에 어웨이경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니 순수하게 스포츠만 하지 못하고 속으로는 호남의 정서를 대변했었겠다. 뼈를 갈아 넣으면서라도 절대로 질 수 없었던 그들의 행보가 안쓰럽고 고맙다. 앞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광주팀의 명성을 이어가기를 바라며, 기아 타이거즈를 나의 무등산 호랑이 제6호로 임명한다. 양현종은? 그 중의 왕호랑이다.

지인과의 대화에서 “언제까지나 5·18이냐”라는 말은 날카롭게 가슴에 얹혔다. 처음 들은 말이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이 퉁명스러운 표현은, 5·18을 직간접적으로 앓아본 적이 없는 이들의 솔직한 속내일 것이다. 아픔을 겪은 적이 없는데, 공감을 강요당하는 것처럼 불편하다는 것이다. 오해다. 아픈 사람들은 이미 더 아플 데가 남아나지 않게 다 아파 버렸다. 과거사 청산은 철저히 이기적으로, 살아남은 나 자신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다. 무죄하게 흘려진 피가 공의를 호소하면, 하늘은 놋과 철이 되어 이슬과 비를 내리지 않고, 땅은 그 소출을 주기를 거부한다고 했다. 아픈 역사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과거사는 청산되어야 하고 5·18이 그 첫 신호탄이 될 수 있다.

영광의 날은 거저 오지 않았다. 너와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의 사소하지만 비범한 기여가 뒷받침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잊는 일이 없도록 광주송정역 대합실에서는 5·18 당시에 시민군에게 나눠줬던 국수와 주먹밥을 판매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마다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빵, 구운 고기를 먹으며 노예 시절을 되새기듯, 살아남은 우리가 꼭 먹어야 할 음식이다. 다행히 맛도 좋은 국수와 주먹밥을 먹으며 우리는 게시판의 글을 읽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 국수와 주먹밥을 먹는 모든 이들을 나의 무등산 호랑이 제7호로 임명한다.

그러니 말이다. 다시 질문하라. 무등산에 호랑이가 있냐구?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나의 호랑이들만이 아니라 다른 호랑이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산에나 호랑이는 있었다 하겠지만, 특히 무등산에서는 엄연히 살아 움직이며, 골짜기와 정상에서 포효하며 호보당당(虎步堂堂)하게 무등산을 지켜나가는 산신령이 호랑이들이다. 나의 무등산 호랑이들을 조심스럽게 소환하는 동안 나는 슬프고 부끄럽고 아프고 화가 났다. 당신의 무등산 호랑이들은 누구인가?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고 애틋하고 고마운 존재들인가? 그렇다면 당신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어쩌면, 혹시 어쩌면 됩대로 당신 자신이 그 호랑이들 중의 하나인가? 감히 요청한다. 포효하라. 무등산에 메아리치는 그 포효들에 당신의 포효를 덧붙여라. 귀를 열어 경청하리라.

십 년쯤 전에 들은 이야기다. 장래 희망이 대통령이라던 놈. 지도교사는 짐짓 만류하는 체하며 도발(?)했다고 한다. “네가 삼백 쪽의 책 천 권을 읽으면, 말리지 않겠다. 만약 삼천 권을 읽으면 선생님이 네 선거 캠프에서 선거운동을 돕겠다”라고. 아이는 책 천 권을 읽었고, 그의 형이 육군사관학교에 가겠다고 선언을 하고 나섰다. 동생을 돕기 위해서란다. 나는 웃었고 광주 그놈이 대선에 나온다면 안 죽고 살아있는 한 링거를 꽂고 병상 채 들려서라도 투표소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지금쯤은 대학에 다니거나 졸업했겠지. 이렇듯 무등산 자락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새끼 호랑이가 오직 그놈 하나뿐이랴. 나의 무등산 호랑이 제8호야, 어서 커라. 이 늙은이가 너를 위해 소중한 한 표를 움켜쥐고 눈을 감지 않게 해 다오.


<운문 부문 일반부 최우수상 정경균 - '오월 아침에'>

단비 내린 후
텃밭에 고추 모종 심어
지줏대 세워 묶어 주었다

세상 풍파는
저리 소용돌이 치는데
온몸에 슬픔 퍼담고서

무릎 꿇지 않는 기개
짓뭉그러진 밤 박차며
두 눈 부릅떴다


<운문 부문 학생부 최우수상 김민찬(광주 문성중) - '5월 따뜻한 봄날의 비극'>

지금으로부터 40년전, 자유가 억압받던 시대가 있었다.
대통령 하나 우리 마음대로 뽑지 못하던 시대가 있었다.

우리들은 불의를 참지 않았다.
거리로 나서서 민주주의 수호를 외쳤다.

군홧발에 짓밟이고, 쇠몽둥이가 날아와도,
우리들은 무등산 정상에 민주주의의 깃발을 꽂기 위해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총성이 들려오고, 금남로가 피로 물들었다.
우리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1980년 5월 18일, 봄날의 비극을,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


<산문 부문 일반부 최우수상 정지유 - '무등산 지산유원지'>

하늘이 개벽 하나 빗줄기 쏟아진다
어와 온세상 흙먼지 일어 나고
번개가 번쩍 하고 광이 난다

무등산 내려 앉아 무너진다
어와 무등산 어찌하여 무너지나
이제야 멀리 주저 앉는 굉음이 들려오네

무너진 무등산은 회색 잔해 되어가네
회색 잔해 하늘로 멀리 멀리 퍼져가네
하늘로 퍼진 잔해 비되어 내려오나

저 바위 무등산에서 본 듯도 한져이고
칼로 말아낸 듯 무등산 사라져 적적하네
무등산 어드메오 나의 고향은 어디로 갔나
나는 이제 어데서 사나 고향을 떠나 어데서 사나


나는 놀라며 눈을 떴다. 무등산이 무너지는 좀 전에 꾸었던 꿈을 곱씹어 보았다. 거칠어지는 숨을 좀처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나는 몽롱한 정신을 부여잡고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커튼이 들썩이는 반쯤 열린 창문에서 서울에서 온 듯한 일단의 대학생들이 환희로 가득 차 보인다. 나는 한참 동안 그들을 바라보았다. 서울 소재 명문대학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맞추어 입은 그들은 마스크를 벗고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학생들의 표정엔 아무런 근심 따위는 없어 보인다. 그들 뒤로 다시금 무등산이 보였다.

‘무등산’ 하면 떠오르는 통념들이 모두에게 있을 것이다. 내게 무등산은 삶의 터전이었고, 그것은 우리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무등산은 우리나라 어디보다도 깨끗한 공기와 환경을 가지고 있지만 나에게는 감옥과도 같았다. 개미에게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진드기의 삶처럼 말이다.

우리 집 앞에서 전경을 가득 메우는 무등산에선 아버지가 항상 잔재한다. 아버지는 무등산 지산유원지에서 일하는 것을 몹시 자랑스러워한다. 그래서인지 ‘무등산 지산유원지’ 라벨이 붙은 빨간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일터에서 무등산 리프트의 케이블을 매일 만진 탓인지 모르겠지만 기름때가 낀 검은 손처럼 얼굴도 검었다. 아버지의 검게 그을린 피부에선 언제나 기름 냄새가 배어 있어 아버지가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시면 집안은 진한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멀리 보이는 무등산을 배경으로 흐릿하게 된 눈의 초점을 바로잡았다가 다시 흐리게 하는 것을 반복하며 무료한 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중 ‘무등산 지산유원지’ 모자를 쓰고 검은 손을 앞뒤로 힘차게 저으며 집으로 오고 있는 아버지가 보인다. 언제나처럼 아버지가 들어오자 순식간에 온 집안이 검은색 액체의 기름 향기로 뒤덮인다. 나는 코를 한 손으로 미약하게 거며 쥔다. 코를 잡은 손과 함께 아버지에게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를 한다. 오늘은 꼭 말해야 했다.

“아버지, 저 이제 서울 갈래요. 대학까진 여기 광주에 있는 전남대학교를 나왔지만, 이제는 서울에 가서 일하고 싶어요.”
“너는 또 그 소리냐? 너 마음대로 해라.”

손톱에 낀 기름때를 벗기기 위해 비누로 벅벅 손을 닦기에 집중하던 아버지가 거칠게 수도꼭지를 잠그며 나를 노려본다.

이상하게도 어젯밤 꾸었던 무너지는 무등산이 떠오른다. 말도 안 되는 꿈. 나는 우리 집과 다름없는 저 무등산이 끔찍이도 싫었지만 한편으론 그 꿈이 현실이 될까 봐 두려웠다. 지산유원지 리프트의 케이블을 만지며 거친 숨을 몰아쉬어 얼굴이 상기된 아버지가 무등산과 겹쳐 보인다. 나는 이번에는 기필코 무등산을 떠나리. 아버지의 기름 냄새로 가득 차 질식할 것만 같은 무등산 이곳 말이다.

어두운 밤과 대비되는 반짝거리는 서울의 조명과 불빛들,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화려한 색들이 내 시야에 들어선다. 나는 서울에 있는 사촌 형의 집에 당분간 머물러 있기로 했다.
“형, 서울 야경 너무 좋네요.”
“너 그거 다 허상이야. 아버지한테 말씀은 드리고 온 거지?”
빨간 모자를 쓰고 한층 표정이 어두울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제가 지금 서울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요.”

내가 그토록 열망했던 서울이라는 공간에 있는 나는 드디어 일을 시작했다. 고딕체로 “서울 술집” 이라고 쓰여 있는 파란색 앞치마를 멘다.
“광주에서 왔다고?”
내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장은 나를 쳐다도 보지 않고 포스기만을 두드린다.
“네. 열심히 일 할 자신 있어요.”
혹시나 사투리가 튀어나올까 어색한 서울말을 하는 나의 목소리는 자신감 없이 한층 더 작아진다.
“여기 소주 한 병이요.”
주문이 밀려들어온다.
“몇 번을 말해. 여기 맥주 달라니까?“
이마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액체들이 나를 푹 적실 때쯤엔 오늘의 하루가 끝났다.

끼이익- 하고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사촌형 자취방 문이 열린다.
“형, 뭐 하세요?”
“이번 달 월세랑, 생활비 계산하고 있었어. 참, 너 오늘 일 갔다 왔지. 어땠냐?”
“나 다시 광주로 내려갈래요.”
고개를 돌리면 한강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다. 저 물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나는 광주 집 앞에 서성이고 있다. 익숙한 아버지의 기름 냄새가 공기를 타고 코로 느껴진다. 서울에서의 경험이 나를 다시 여기 무등산으로 돌아오게 했지만 잔뜩 화가 나 있을 아버지의 얼굴이 선해 집에 가기가 두려웠다. 차가운 문의 손잡이를 잡고 한참을 망설였다. 덜컥- 나는 집안으로 들어간다.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뒤통수가 보인다. 아버지는 며칠 동안 수염을 밀지 않은 것인지 보기만 해도 까끌까끌한 턱 주변이 거뭇했다.

“그래, 서울은 어떠했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늘 나랑 같이 무등산 지산유원지에 가봐야겠다.”

아버지와 나는 나란히 걷고 있다. 굳었지만 은은한 미소를 띤 아버지의 얼굴에서 어느새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나란히 걷고 있는 뭉툭한 그림자가 움직일 때마다 나의 마음에도 편안함이 들어서는 것 같았다. 어느새 무등산 지산유원지 리프트 탑승장에 도착했다.

드르륵 - 체인을 감는 소리가 들릴수록 아버지의 찡그린 인상과 함께 팔 근육이 오소소 살아난다.
“어서 타라.”

탑승장에 쿵- 하고 내려앉은 리프트에 나는 조심스럽게 한 발을 올리고, 나머지 한 발도 올렸다. 부우웅~ 하고 몸이 뜨는 감각이 생경해진다. 시야가 올라갈수록 점처럼 희미해지는 우리 집이 보인다. 각기 다른 모양과 무늬의 초록색과 붉은색 이파리들이 투명한 창에 비쳤다. 빼곡한 나무들이 일렬을 이룬다.

-리프트가 무등산 빛고을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느새 ‘덜컥’ 소리와 함께 리프트는 20분간 745m 거리의 운행을 마치며 빛고을역에 도착해 있었다.

“아들아, 여기가 향로봉이고 저기서부터 장원봉, 원효봉, 낙군봉, 장군봉이다. 지산유원지가 생긴 것이 1978년도였을 것이다. 저 무등산에 케이블 설치하고 리프트 운행한다 했을 때 여기 광주 사람들이 얼마나 반대하고, 시끄러웠는지를 너는 모를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광주 사람들이 피켓 들고 무등산 지켜야 된다고 난리도 아니었지. 그때 내 아버지, 그러니까 너의 할아버지도 엄청 반대를 했다. 하지만 지금 저 무등산 리프트는 너를 키워낸 나의 신성한 직장이다. 그리고 리프트를 타고 무등산 올라가는 사람들 보는 게 내 인생의 큰 보람이지. 사람과 무등산을 잊는 저 리프트가 우리 가족과 광주를 지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항상 어둡던 아버지의 검은 눈 밑에 노란 햇살이 비쳤다. 매일 창으로 보면서 지겹다 여겼던 무등산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느껴지는 무등산의 냄새가 너무나 좋았다. 이 경이롭고 푸른 생명체들이 우리 집 앞 무등산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아버지는 미련하리 만큼 이곳 무등산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는 무등산에선 어떤 남자가 굳건히 초록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아버지의 기름때 낀 검은 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가을로 환복한 무등산이 보인다. 낙엽이 썩는 내가 난다. 붉어진 무등산과 이를 오르내리는 무등산 리프트가 참으로 어울려 보였다. 나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을 것이다. 내 청춘은 이곳 광주 무등산에서, 아마도 계속될 것이다.


<산문 부문 학생부 김지원(광주 문성중) - '사미인곡, 정철과 함께'>

1.
5교시 국어 시간
“오늘은 ‘사미인곡’을 할 차례지요.”
선생님의 말씀이다.
예전에 사미인곡을 배운 적이 있으며, 조선 시대 정철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선생님께서 사미인곡을 먼저 읊어주셨다. 나도 이 시를 읽은 경험이 있기에 시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용은 그저 정철이 임금을 사랑했던 내용을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로 풀어쓴 것만 같았다.

봄날의 햇살이 나를 비추고 있었으며, 나는 그대로 잠을 잘 것만 같았다. 수업시간 도중에 잠을 자는 것은 학생의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나는 일어나서 수업을 들었다. 시계를 보려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이 잠에 들어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선생님만이 앞에서 혼잣말을 할 뿐이었다. 나는 그 순간 수업에 대한 의욕이 사라지고, 눈꺼풀은 계속해서 나에게 잠을 요청하는 기분이었다. 다시 내 의자에 앉아서 본격적으로 잠을 자기 위해 팔베개를 하고 느긋하게 누워서 수업을 듣고 있던 참이었다.
수업을 듣던 도중 문득 정철이라는 사람은 ‘왜 그렇게 절절히 임금에게 충성을 다했을까?’ 궁금해 졌다. ‘정철은 왜 그렇게…….’ 그대로 잠에 빠져 들었다.

2.
갑자기 무엇인가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어, 살며시 눈을 떴다. 낯선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화나 TV에서 볼 법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꾀죄죄한 바지 적삼을 입은 아저씨, 부스스한 댕기머리를 딴 아이들 서너명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어, 여기가 어디지? 난 분명이 교실에 있었는데…….’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그 유명한 시간여행인가?’라고 얼떨떨해 있는데, 갑자기 어떤 아저씨의 우렁찬 고함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난지 알아보려고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어떤 아저씨가 나에게로 돌진하고 있었다. 너무 놀라 재빠르게 뒷걸음질 쳐 달렸지만 결국 막다른 길에서 잡히게 되었다. 아저씨는 나를 붙잡아 어디로 데려갔다.
“아저씨, 나 어디로 가는 거예요?”
내가 말했다.
“마을에서 가장 으뜸이신 분께 가는 중이니 입 닥쳐라”라고 아저씨가 말하였다.
무슨 일인지 파악도 안되고 뭔가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따라갔다.

어느덧, 마을에서 가장 유명하고 으뜸이신 분에게 다다른 듯했다. 그곳에는 나의 친구 성철이가 무릎 꿇고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아저씨가 말한 마을에서 으뜸이신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를 데려온 아저씨들이 나를 무릎 꿇게 하였고,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정황을 짐작해보니,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를 조사하는 듯했다.

친구의 조사를 끝마치고 내가 대답할 순서가 왔다. 내 예상 그대로 나에게 어디서 온 누구인지를 물었다. 나는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고 할 수 없으니, 할머니와 함께 벼농사를 지으며 일하던 청년이라고 대답했다. 뭔가 근엄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내 말을 믿어주는 듯했다. 그런데 내 옷차림에 대해 물었다. 어찌 그렇게 상스러운 옷을 입고 있냐고 호통을 치셨다. 할 말이 없어서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더니, 옷을 한 번 주시면 갈아입으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곧장 내 조사를 마쳤다. 의외로 긴장되었던 순간이었지만, 빨리 끝마친터라 기분이 좋았다.

으뜸가는 아저씨의 얼굴을 계속 보았는데 내가 어디서 본듯한 얼굴형상이었다. 그 얼굴은 국어책 속 사미인곡 시 옆에 나와 있었던 사람의 얼굴과 같았다. 그 순간 그 할아버지가 정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장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정철 할아버지 맞으시죠?”라고 물었다.
그 할아버지는 나를 보고 웃으며, “어찌, 내가 정철인지 알았느냐?”라며 되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다 아무래도 성철이와 나의 정체를 밝혀야 할 듯했다.
“우리는 먼 훗날 미래에서 왔어요.”라고 했다.
정철 할아버지는 우리를 보고 매우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셨다.
할아버지는 한 참이나 우리를 뜯어보시고 창 밖 하늘을 보시곤 했다. 숨이 잘 안 쉬어질 정도였다. 우리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 알 수 없는 눈빛에 다시 두려움이 몰려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도 안 될 때, 정철 할아버지는
“그럼, 너희 혹시 내가 쓴 ‘사미인곡’을 아느냐?”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두말할 것 없이 알고 있다고 대뜸 대답했다. 그리고 국어 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이야기해 드렸다. 그러자 정철 할아버지는 우리를 ‘송강정’이라고 하는 정자로 데리고 갔다.
정자 가운데 앉으신 할아버지는 안주머니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내었다. 거기에는 깨알같은 글씨가 가득했다. 아마 우리가 말한 그 시 같았다.
나는 흥분한 나머지 할아버지께
“이 종이로 사미인곡을 다 작성하신 거예요?”라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실제로 내가 쓴 전문은 소중히 보관 중이고, 이 천조각은 그저 그것을 베낀 거야.”라고 하셨다.
똑바로 자리 잡고 사미인곡에 대한 정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미인곡은 정철 할아버지께서 50세가 되셨을 때 쓰기 시작하셨던 시였으며, 4년의 걸쳐 이 시를 완성했다고 하셨다.

정철 할아버지의 말씀을 귀담아 듣던 나는
“할아버지는 왜 사미인곡을 쓰기로 마음먹으신 거예요?”
라고 질문했다. 느리게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시던 할아버지는 한숨을 크게 쉬시더니,
“그야 내가 그냥 전하를 향한 나의 충정을 알리고 싶어서 지은 거지.”
라고 말씀하셨다. 온 얼굴에 진심이 가득한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한 마디 더 묻고 싶어졌다.
“임금님은 할아버지의 마음도 모르잖아요. 다른 신하들 이야기만 듣고 벼슬도 뺏고 이렇게 시골에 보내버렸는데,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으세요?”
“그리고 곧 전쟁이 터질 거란 말이에요. 선조 임금님이 이이 아저씨의 말을 듣고 군대를 만들었다면, 조선은 괜찮았을 거란 말이에요.”
라는 말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아뿔싸, 정철 할아버지는 아직 모르는데.’ 내가 손으로 입을 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라고 할아버지가 놀라서 큰 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오늘이 4월 13일이에요. 그러니까 지금쯤 부산이 함락되고 있을 거란 말이에요. 일본놈들이 곧 여기도 올 거란 말이에요. 어서 피해야 해요. 아니면 의병을 만들던가.”
내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붓자, 할아버지는 염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며 자세히 말해달라고 했다. 나는 내가 아는 만큼 임진왜란에 대해 말씀드렸다.

3.
그때 추월산 봉우리에 봉화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창평 관아에서 징 소리가 울렸다. 나는 내가 아는 대로 일이 전개된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했다. 반면 친구는 나와 달리 긴장한 상태였으며, 세세한 사실까지는 알지 못한 정철 할아버지도 매우 긴장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나도 점점 몸이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말없이 주변을 바라보는데, 정철 할아버지는 일단 가족과 하인들에게 피난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자신도 어떻게 할지 아들과 의논하는 듯했다.

정철 할아버지네 집으로 건너와 상황을 살피던 나는, 그 순간 갑자기 이순신 장군님 생각이 났다. 시대의 흐름을 깨고 과거로 넘어왔는데, 이순신 장군을 보지 않고 떠난다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지금 이순신은 어디에 있었더라?’ 기억을 더듬었다. 이순신 장군은 지금쯤 아마 전라 좌수영인 여수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사실을 듣고 서둘러 준비를 하고 계실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께
“우리 이순신 장군님 만나러 가면 안될까요?”
라고 물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도데체 이순신이 누군데 보러가자는 거냐?”
라며 의아해 하셨다. 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상황을 조금 자세히 말씀드리고 이순신 장군님의 활약상도 말씀 드렸다. 그랬더니 정철 할아버지는
“그렇구나. 유성룡의 친구가 그런 일을 했단 말이구나. 나와는 정적인데…… 그래도 다행이네. 하지만 전쟁 중이니 이순신을 보러 가기가 쉽지 않을 테야.”
라고 답하셨다.
나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큰소리로
“왜 안되나요?”
라고 물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순신이 이미 출범 준비를 다 했을텐데, 이런 극박한 상황에 만나러 가자는 것이 말이 되느냐?”
라며 호통을 치셨다. 그런데 문득 나에게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목숨을 걸어 이순신 장군님 거북선에 뒤따르는 배에 몰래 탑승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목숨이 위험할지라도 너의 희생정신에 감동했다.”
라며 나와 함께 가주시기로 했다. 우리는 광주를 지나 여수로 길을 서둘러 떠났다.

4.
5월 4일, 이순신 장군님께서 출범하실 날짜가 다가왔다. 우리는 들키지 않고 이순신 장군을 보기 위해 다른 거북선 가장 높은 천장 근처에 올라가 있었다. 이후 사람들이 거북선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옷으로 무장한 사람들 모습이 마치 현실판 군인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거북선이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 듯 했으며, 이제는 전쟁이 시작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저기서 대포 소리가 들렸으며, 나와 성철이는 잔뜩 긴장했다. 포 소리가 들린지 1시간이 지났을 무렵 거북선 내부에서는 땀 냄새가 나고 매우 습했다. 마치 내가 구운 고구마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올라와 있는 나무판자가 너무 무거운 무게를 싣기에는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갑자기, 나무판자에서 지지직 하는 소리가 났으며, 우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성철이가 앞에 위치하고 있었던 터라 배 안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에게 발각되었고, 할아버지와 나는 급하게 뒷문에 숨었다. 아저씨들이 성철이에게
“네 놈은 누구냐? 왜군 앞잡이구나.”
하고 소리쳤다. 성철이가
“아니오, 조선 사람입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성철이의 발음이 다소 어눌했던 탓인지 아저씨들은 성철이를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으로 착각하고 성철이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성철이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와 할아버지는 몹시 겁에 질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이순신 장군님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내 목숨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조용히 문 뒤를 지켰다. 그러던 와중, 문 뒤에서 어떤 아저씨가 우리에게
“어디서 온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다. 정철 할아버지께서 자신을 소개하며 위기를 잘 대처해주신 덕분에 나와 할아버지는 무사히 죽지 않고 그 아저씨들과의 전투를 함께 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투가 끝났다. 너무 무서웠던 나머지 할아버지와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떠나 담양으로 말을 타고 돌아왔다. 성철이 얼굴이 자꾸 떠올랐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철 할아버지댁에 도착하지 할아버지의 아들과 친척 그리고 남자 하인들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모두 사랑채로 들어가셨다. 아마 의병에 대해 이야기 하시겠구나 생각하며, 비어있는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5.
잠깐 누웠다가 눈을 떴더니, 국어 시간 종료 후 쉬는 시간이었다. 옆자리의 성철이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괜찮니?”
라고 물었다. 나는 성철이를 보고는 성철이를 잽싸게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성철이는 의아해하면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라고 물었다. 나는 황급히 교실 앞 컴터에 가서 정철을 검색해 보았다. 1593년에 돌아가셨다니 아마 내가 만난 정철은 1592년, 돌아가시기 일 년 전의 모습이었나 보다.

정철 할아버지는 1592년 겨울을 어떻게 지냈을까?
그는 여전히 선조임금을 그리워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