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관아 노비의 아들이 조선 최고의 침의(鍼醫)가 됐다. 그의 저서 ‘침구경험방’은 우리나라 침구학 발전의 면모를 보여줄 뿐 아니라, 이후 시기 침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허임은 침구학의 기초 이론과 자신의 오랜 기간의 임상 치료 경험을 종합해 한의학보다는 침과 뜸 치료법에만 집중한 조금 특별한 책이다.


-임진왜란때 광해군 주치의 역할-

허임은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의 관노 허억봉(許億逢)과 예조판서 김귀영의 사노비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나주에서 태어난 그는 출생 시기는 알 수 없다. 그의 집안이 대대로 노비가 된 이유가 있었다. 그의 9대조는 세종 때 좌의정에 오른 허조(許稠)였다.

허조의 아들 허후가 수양대군(훗날 세조)의 쿠데타에 반기를 들고 사육신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에 나섰다가 자결했다. 그 때문에 허임의 조상이 충북 괴산의 관노가 됐으며, 대를 이어 노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허임의 아버지 허억봉은 관아 노비였으나, 대금 솜씨를 인정받아 아우 허룡과 함께 장악원(掌樂院, 지금의 국립국악단)에 들어가서 뼈를 깎은 노력 끝에 연주 책임자인 전악(典樂· 정9품)에 올라 천민에서 벗어났다. 당대 최고의 피리 연주자였던 허억봉은 거문고 연주도 잘하고 학춤도 잘 췄다.

tvn드라마 ‘명불허전’에 방영된 허임과 허준 이야기. /tvn 캡처

아버지 허억봉은 음악 실력으로 노비에서 벗어났지만, 아들 허임은 여전히 노비였다. 어머니 박씨가 예조판서 김귀영의 사노였기 때문이다. 생활도 그리 풍족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 박씨가 병이 들자 허임은 나주읍성에 있는 의원에서 궂은일을 하고 어머니 치료비를 대신했다.

눈썰미가 뛰어났던 어린 허임은 심부름을 하면서 배운 침구술이 마침내 의원의 침술을 뛰어넘었다. 이후 침술의 명인들을 찾아다니며 실력을 닦은 그는 가난한 백성을 치료해 주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당시 약초값이 치솟아 치료를 받지 못하는 백성들이 속출하여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이 넘쳐났다. 이러한 현실에서 침은 아주 유용한 치료기구였다.

침술은 침 하나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약을 쓰는 것에 비해 저렴했다.

신분 차별 없이 아픈 백성을 치료하고 싶었던 허임에게 침과 뜸은 가장 적합한 치료 도구였다. 그래서 허임은 침과 뜸, 침구에 특화된 전문의였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그는 광해군을 수행하면서 3일 간격으로 침을 놓았다. 광해군이 인후증, 편두통 등이 심해 전시상황에서도 수시로 침(鍼)을 놓았다.

광해군의 치료를 도맡으면서 그는 노비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여러 해에 걸친 임진왜란으로 인해 약재가 부족하고, 부상자가 속출해 외과적 진료가 절실히 요구된 시기에 침의인 허임의 활약상은 두드러졌다.

조선의 내의원에는 약을 쓰는 약의(藥醫)와 침을 쓰는 침의(鍼醫)로 구분됐다. 약의는 정식적으로 잡과에 합격하지만, 침의는 민간에 소문난 명의를 스카우트하는 경우가 많았다. 약재를 조달하기 힘든 전시에는 약의보다 침의를 선호하였다. 그래서 허임이 광해군의 주치의 역할을 했다.


임란이 끝난 후 종6품 치종교수(治腫敎授)라는 직책을 받고 궁궐에서 일하게 된 허임은 침술 외에도 종기에 대한 외과 치료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종기는 약물치료로 완치할 수 없다. 반드시 해당 부위를 째고 병근을 뽑아내야만 한다”

허임은 70대 중반에 충남 공주로 낙향해 의서 ‘침구경험방’을 저술했다. 공주시 소재 기념비

당대 최고의 어의였던 허준(許浚)과 함께 선조의 진료를 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허준과 허임의 나이 차는 30년 이상이다. 허준은 침술과 외과 수술 능력이 뛰어난 젊은 허임을 끌어줬다.

1604년(선조 37) 9월23일, 한밤중에 선조가 평소 앓던 편두통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

어의(御醫) 허준(許浚)의 추천으로 침을 놓은 그는 그 공로로 당상관까지 올랐다. 이후에도 허임은 십여 차례 선조에게 침을 놓았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허임은 영평 현령, 부평 도호부사, 남양 도호부사로 임명됐고, 외직에 나가 있으면서도 수시로 궐에 들어와 침을 놓았다.

광해군의 총애가 갈수록 높아지자 양반 관료들에게 끊임없이 탄핵을 받았다. 실록에는 그의 미천한 출신을 깎아내리는 사관의 사론(史論)도 여러 차례 실렸다.

“허임의 아비는 관노이고 어미는 사비이니, 비천한 가운데 더욱 비천한 자입니다. 침술로 녹훈됐으니 이미 분수가 넘쳤습니다. 이전에 군수로 일할 때 아전들이 그의 밑에서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서울의 팔다리가 되는 중요한 양주목사로 임명해서는 아니 되옵니다.”(사헌부 상소)


조선의 양반들은 천민 출신이 요직에 임명되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10일간의 사헌부 상소가 이어지자 광해군은 편법을 써서 허임을 곁에 뒀다.

“부평은 양주보다 덜 중요한 지역이다. 내가 이 정도로 배려했으니 너희들과 대충 물러서야 하지 않겠느냐?”

허임을 가까운 곳에 두고 유사시 몸이 아플 때 궁궐로 빨리 불러들이기 위해 광해군이 절묘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자 허임도 남양 도호부사에서 파직되고 위성공신호도 10년 만에 삭훈됐다. 하지만 그의 침술은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으므로 그를 쫓아낸 인조마저 수시로 허임을 불러 침을 맞았고 효과를 보자 상을 내렸다. 그리고 정사원종공신으로 녹훈까지 했다.


-저서 ‘침구경험방’ 중국과 일본에도 영향-

허임이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침과 뜸,침구 치료법에 집중한 의학서 ‘침구경험방’.

허임이 70대 중반에 저술한 ‘침구경험방’은 1644년(인조 22)에 전라도 감영에서 목판본으로 처음 간행됐다. 당시 내의원 제조 이경석은 이 책의 발문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낸 명의로 추앙했다.

“태의(太醫) 허임은 평소 신의 의술로 일컬어졌고 평생 치료한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가 없다. 그중에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낸 경우도 많아 일세에 명성을 떨쳤으며 침의들에게는 으뜸으로 추앙되었다. 지금 이 경험방은 귀로 듣고 마음에 담아뒀다가 손으로 시험해 본 것이다. 분명치 않은 것은 분명하게 하고, 번거로운 것은 요약했으며, 틀린 것은 바로잡았다. 질병의 원인과 치료의 중요한 묘방이 한번 책을 열면 곧바로 눈앞에 선명하니 간략하면서도 쉽게 요약되어 상세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침구경험방’은 여러 차례 간행됐고, 일본에도 전해져 17세기 초에 이미 일본 판본으로 간행됐다. 중국에서도 청나라 말기부터 이 책의 내용이 포함된 ‘침구집성’이 여러 차례 간행됐다.

허준의 ‘동의보감’이 침구 이론에 중점을 뒀다면, 허임은 침구 임상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둘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신광재 역사문화전문기자는 대학에서 한국미술사와 한국사를 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