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에서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 명뿐입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큰년’ ‘작은년’으로 불립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서서평의 편지 일부 발취)

“한 달간 500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이 굶주리고 있거나 병이 들어 앓고 있거나 소박을 맞아 쫓겨나거나 다른 고통을 앓고 있었다.”(서서평의 일기)

1921년 일제강점기하에서 여성의 삶을 바로 보여주는 선교사 서서평(徐舒平)의 편지와 일기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서 남녀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100년 전 만 하더라도 여성들이 이름을 가지고 살아간 것은 아니었다. 거의 이름이라고 할 수도 없는 호칭을 갖고 살아간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살았는지 알아보자.

조선시대 대부분 여자는 이름이 없었다. 어릴 때 부모가 별명을 지어주면 친구들과 친척이 별명을 불러주다가 나이가 들면 아무개의 딸, 아무개의 누이 또는 동생으로 불리었다.

시집간 후에는 친정 고을의 이름을 따서 ‘광주댁’, ‘나주댁’으로 불리었으며, 때로는 간단하게 아무개(남편의 성) 댁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아들이 성장하면 아무개의 어머니로 불리다가 죽은 후 묘비에 이름은 생략한 채 ‘김해 김씨’, ‘전주 이씨’ 등으로만 표기했다.

흔하진 않지만, 여성에게 이름이 부여되는 때도 있었다. 재판을 받게 되면 고을 수령이 직권으로 법정에 출두한 여성에게 그 자리에서 이름을 직권으로 아무렇게나 지어줬다. 재판 판결문에 이름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즉 조선시대 여성들은 ‘아명’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딱 100년 전, 1921년 한 달 동안 전라도를 둘러 본 서서평의 눈에 특히 여성의 삶은 마치 지옥과 같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그녀는 조선 사람이 아니었다.

독일에서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난 그녀, 엘리제 쉐핑(1880-1934)이다.

한 살 때 아버지가 죽은 후 살림이 어려워지자, 그녀의 어머니는 세 살 된 쉐핑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생계를 위해 미국에 이민을 떠났다. 그러나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9살의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어머니를 찾은 쉐핑은 간호학을 전공하고 간호사를 지내던 중 개신교에 투신했다. 32살 때 선교국이 해외로 파견하는 간호 선교사로 선발된 그녀는 일제강점기하였던 1912년 3월,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다. 그녀가 처음 도착한 곳은 지금의 광주기독교 병원이다. 그녀는 기독교 병원에서 4년간 근무하다가 군산 예수병원과 서울 세브란스 병원 간호학교의 교사를 거쳐 1919년 광주 제중병원(현 기독병원)간호사로 다시 일하게 됐다. 죽기 전까지 그녀는 대부분 기독교병원 간호사로 일하면서 기독교 선교활동과 의료활동, 그리고 여성 사회사업을 했다.

말을 타고 한달동안 전라도 전역을 돌며 의료봉사와 선교할동을 하면서 어린이들과 함께 찍은 모습.

쉐핑은 어릴적 버림과 외로움을 몸소 겪어서였는지 성격이 급했다.

때문에 그녀는 매사에 서서(徐徐)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성을 서(徐)씨로 했다. 그리고 이를 또 강조하는 뜻에서 이름의 첫 자를 천천히 할 ‘서’(舒)자로 짓고, 두 번째 자는 모난 성격을 평평하게 한다는 뜻에서 평평할 ‘평’(平)자를 붙여 서서평이라고 지었다.

그의 본이름인 ‘쉐핑’의 발음을 살린 것이기도 했다. 광주에 와서 한국말과 한국 풍습을 제대로 익히면서 이름도 ‘쉐핑’에서 한국 이름 서서평(徐徐平)으로 바꿨다. 그리고 신발 끈을 동여매고 광주와 전라도 선교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1년 가운데 100일 정도를 의료가방을 들고 전라도 진료 여행을 떠났다. 여자였지만 스스로 말을 타고 한 달 이상 270㎞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어야 했지만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녀를 기다리는 고아와 한센인 등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제주도까지 갔던 그녀는 전도 여행을 다니며 병자들을 돌보고 여성들을 교육시켰다.

당시 일제강점기하에 전라도 사람들의 삶은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저잣거리를 헤매는 여자 나병 환자와 거지들이 넘쳐났다. 기독교 병원에서 퇴근하는 길에 그녀는 그들을 만나면 집으로 데려와서 목욕을 시키고 밥을 줬다. 그리고 자기 옷을 나눠 입혔고, 자신에게 부쳐온 선교헌금을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몽땅 썼다. 그래서 자신은 남자들이 신었던 검정고무신 한 켤레로 1년을 견뎠다.

광주에 내려와 한복과 고무신을 신고 조선인이 되고자 했던 그녀.

보리밥에 된장국만 먹으면서 한센인과 거지들의 삶을 보살핀 탓에,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자신에게 부쳐온 선교헌금을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몽땅 써 버린 후 정작 본인은 1934년 6월 말, 과로로 인한 영양실조로 54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살아생전 결혼을 하지 않았던 서서평이 남긴 전 재산은 두 벌의 옷과 거지에게 주고 남은 담요 반장, 그리고 강냉이가루 2홉, 현금 27전 뿐이었다.

“(내가) 호흡만 거두면 시체를 해부해 연구 자료로 삼으시요”라고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침대맡에 유언 같은 한마디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NOT SUCCESS, BUT SERVICE)이라고 적혀있었다. 눈물은 이런 때 흘려야 할 것이다.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할 것 없이 가난하고 병약한 많은 사람을 보살펴 줘 ‘나환자들의 어머니’, ‘조선의 어머니’로 불렸던 그녀다.

주님 닮기를 원했던 그녀는 여성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나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노력하여 한일장신대의 전신을 세우고 애양원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녀는 선교사였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어머니였고, 한복에 검정 고무신을 신으며 살아낸 조선인이었다.

마지막 순간 자신의 시신마저 의학용으로 기부하며 조선을 위해 죽은 하나님의 딸이었다. 서서평 선교사가 짧다면 짧은 생을 통해 남기고 싶었던 것은 오직 예수님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서서평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남구 양림동 선교사 묘원 주위를 ‘서서평길’로 명명하였으며, 양림동 뒷산 선교사 묘역에 작은 비석으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신광재 역사문화전문기자는 고려대에서 고고학과 한국미술사를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