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미완(未完), 그 영원성 / 수필 - 탁현수
2021. 08. 30(월) 19:38 가+가-
문밖출입을 멈춘 지 보름도 훌쩍 넘었습니다. 코로나 역병은 공포를 넘어 온 세상을 고립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선생이 학생을 만나지 못하는 생활은 하루하루를 종잡을 수 없는 허둥거림으로 보내게 합니다. 다만 지금의 상황이 유한할 것이라는 믿음만이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지요.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어렵게 맞이한 방학과 함께 모처럼 혼자만의 오롯한 시간입니다. 다행히 마스크 없이도 마음 놓고 배회할 수 있는 마당이라는 공간이 있어서 낮에는 해바라기, 밤에는 별바라기에 날짜를 세는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대숲을 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도, 언덕 위 갈참나무 끝에 걸린 구름자락도 어느 때보다 자별합니다.

이럴 때 음악이 빠질 수 있나요. 감성적으로 가장 치열한 결투를 했던 청년 시절의 음악을 소환해다가 며칠을 같이 했습니다. 간간이 흩뿌리는 눈발과 함께 몽롱하게 변해버린 잿빛 날씨 탓이겠지요. 오늘은 ‘드뷔시’입니다. ‘달빛’으로 시작한 잔잔하고 몽환적인 그의 선율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습니다.

곡이 바뀌고 몇 소절이나 이어졌을까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습니다. “전설 따라 삼천리!”. 분명 성우 유기현 님의 능란한 목소리를 감싸던 그 아름다운 멜로디입니다. 서둘러 검색을 했더니 MBC 라디오 연속극 ‘전설 따라 삼천리’ 시그널 음악으로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의 ‘작은 모음곡’ 중 ‘조각배’가 틀림없습니다. 귀신, 구미호, 도깨비, 늑대 등 온갖 음산한 것들에 둘러싸여 죽음의 순간을 넘나드는 무시무시한 드라마에 그토록 아름다운 선율을 담을 생각을 했다니요. ‘전설 따라 삼천리’는 인생에서 가장 순수했던 18년의 세월을 울고 웃으며 함께 했습니다. 방영 시간이 밤이었고 늘 모여서 청취를 했으니 가족 공동 추억이 되는 셈이기도 하지요.

현실의 장벽으로 인한 좌절과 운명론적 비극. 세상 속에 남겨 놓은 안타까운 그 비극의 흔적들을 가슴으로 안으며 어지간히 동동거렸습니다. 주인공들이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다른 세계를 상상해 보기도 하고 사무친 이별의 정한에 몰입하여 몸을 떨기도 했습니다. 그 무엇보다 마음 졸였던 것은 미완(죽음)으로 맺는 아슬아슬한 결말이었습니다. 금기사항을 어겨서, 부과된 과제 해결의 기한을 넘겨서 결국 완결되지 못하고 대신 남기게 된 바위, 산, 꽃과 같은 여러 상징물은 인간이 또 다른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생명력으로 재탄생되더군요.

전설에서의 좌절은 비장함을 낳고 그 비장함은 영원을 향해 꿈꿀 수 있는 신비한 힘을 줍니다. 죽음이 없는 무한한 시간을 갈망한다는 것은 거꾸로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의 유한성을 자각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 『두이노의 비가』가 생각납니다. 릴케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늘 미완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죽음도 고통도 없는 완전한 결정체 천사에 비추어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천사와 달리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임을, 아니 그 개별성을 인식해야 함을 말함이겠지요. 시간의 유한성을 알고 자신의 죽음을 예기하며 살아가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 죽음이라는 미완의 좌절이 있기에 순간의 아름다움, 관계의 소중함, 탄생의 기쁨 같은 삶의 최고의 순간들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고통까지도 감내할 수 있는 명약이 되는 셈이지요.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며, 미래의 상상을 꿈으로 엮어 가는 시간이 존재하는 한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도 미래도 영원할 수 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영원을 꿈으로 꿀 수밖에 없는 인간이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은, 유한한 미완의 시간 속에서 영원의 시간을 그렇게 만들어 가는 일이 아닐까요.

<탁현수 약력>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1995), 광주문인협회 부회장
▲작품집 : ‘한 걸음만 느리게’ 외 3권. ‘기다림, 그것은’(선집)
▲수상 : 수비문학상, 광주문학상, 대한문학상, 매월당문학상 등
▲문학박사(고전문학 전공), 조선대학교, 호남대학교 외래교수
▲광주 광산구 평생교육원장, 구사편찬 집필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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