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년(현종 2년) 12월 28일.

퇴임을 앞둔 노장 강감찬(당시 63세)과 상장군 지채문 그리고 고려 현종이 늦은 시간 고뇌에 빠졌다. 서경(西京, 평양)이 거란에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하들이 앞다퉈 닥쳐올 두려움에 사지를 떨며 항복해야 한다면서 현종을 압박했다.

왕위에 오른 지 갓 1년 남짓 된 현종으로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거란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10일 만에 서경을 함락하고 총사령관 강조를 죽이자 신하들 반은 이미 도망갔고, 남은 이들은 항복을 재촉했다. 수도 개경에 다음날이면 거란 군대가 무혈입성할 태세였다. 이때 강감찬이 백발을 휘날리며 홀로 나섰다.

“강조에게 죄가 있으니, 근심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거란 대군을 맞아 수적으로 우리 군사가 열세이므로 그 칼날을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회를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당장 남쪽으로 몸을 피해야 합니다.”
“지난날 이원(李元)과 최창(崔昌)이 되돌아와 피난하라고 하더니, 지금은 어디에 있느냐?. 신하된 자의 의리가 결국 이러한 것인가?.”<‘高麗史節要, 현종1년, 12월 28일’>

강감찬의 요청에 따라 이날 밤 현종은 왕비와 이부시랑(吏部侍郞) 채충순(蔡忠順) 등 군사 50여 명을 데리고 개경을 빠져나갔다. 아무 준비도 없이 옷가지만 챙기고 남쪽으로 야반도주를 한 셈이다.

고려와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현종처럼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이는 없었다.

왕위에 오른 것 또한 우여곡절 끝에 18살에 제8대 고려 왕이 됐다. 그렇다 보니 40만 거란군의 침입에 이렇다 할 대비책을 내놓을 수 없는 처지였다.

사생아로 태어났던 현종이 왕위에 오른 과정은 흥미롭다.

현종의 생모는 제5대 왕 경종의 부인 헌정왕후였다. 경종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졸지에 청상과부가 됐고, 왕륜사라는 절 근처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내다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왕건의 아들 안종이었다. 죽은 남편 경종의 백부(삼촌)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런 불륜의 씨앗으로 태어난 인물이 현종이었다.

‘고려사’(高麗史) 열전을 보면 그녀가 어느 날 꿈에 소변을 보았더니 온 나라를 덮쳤고 그것이 모두 변해 은(銀) 바다로 변하자 기이하게 생각해 점을 보았다.

“아들을 낳으면 왕이 돼 한 나라를 가지게 되리라”
“나는 이미 과부가 됐으니 어찌 아들을 낳겠는가”

그 후 그녀는 안종과 불륜을 통해 아이를 잉태했고, 집에 가는 길에 버드나무 밑에서 몸을 풀다가 현종을 낳고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사실은 당시 임금이었던 성종의 귀에 들어갔고, 성종은 안종을 경남 사천으로 귀양보냈다. 현종이 5살 때 안종은 귀양지에서 숨졌다.

<공주시청 홈페이지 캡처>

성종은 딸만 둘 있을 뿐 아들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식이 없던 성종은 불륜으로 태어났지만, 사촌 동생 현종을 불쌍히 여겨 궁중에서 살게 해줬다. 그것도 잠시, 성종이 갑자기 숨지자 그 뒤를 어린 목종이 즉위했다. 목종 어머니 천추태후가 섭정하면서 현종의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 혹시 모를 씨앗을 제거하기 위해 태후는 독약이 든 음식을 현종에게 보내 살해 기도를 했다. 그러나 운 좋게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시절 고려 왕실은 추악한 성 추문으로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었다.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는 외척 김치양과 눈이 맞아 아들을 또 낳았고 목종의 후계자로 옹립하려 했다. 소위 고려 왕실이 개판이었다. 나라가 어지럽게 돌아가자 서경 도순첨사 강조가 난을 일으켜 목종을 제거하고 현종을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현종은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

거란 성종이 ‘강조의 난’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제2차 거란 침입이 시작됐다. 실권자 강조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초반에 우세를 점했으나 한순간의 방심으로 강조는 거란군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인물은 강조이다. 서경 전투에서 수차례 승전했던 강조는 그만 자만심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고 말았다. 전투 중에 바둑을 두고, 거란군이 진영 앞에 올 때까지도 “들어올 테면 와라”는 식으로 방어를 소홀히 했다. 마침내 거란 성종에게 잡혀 ‘거란의 신하가 되면 살려주겠다’라고 수차례 회유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고려(高麗) 사람이다. 어찌 다시 너희의 신하가 되겠는가.”

반면 이현운 등 다른 장수들은 목숨을 애걸했다.

“두 눈이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는데 하나의 마음으로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

강조가 분노해 이현운을 걷어차면서 말했다.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가.”

고려 현종의 파천 지도.

강조는 끝내 거란에 굴복하지 않고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반면 강조의 패배로 개경을 수비할 길이 없어졌고,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남쪽으로 파천 길에 오르게 된다.

‘강조의 난’이 비록 목종을 살해하기는 했지만, 왕실의 기강을 바로잡고 왕권의 재정립을 기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특히 현종이 고려왕권을 안정시키고 문벌귀족체계를 구축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음에 따라 강조를 비난하기보다는 성공한 쿠데타라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신광재 역사문화 전문기자>

임진왜란 때 선조의 파천이 얼핏 떠오르지만, 고려는 항전을 계속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현종의 피난길은 험난했다. 아마도 고려와 조선 역대 왕 가운데 가장 험한 꼴을 당했다.

지방호족들에게 무시까지 당하면서 남쪽으로 몸을 피한 왕은 현종뿐이었다. 개경을 떠나 함께 했던 50여 명이 충남 공주에서 반으로 줄고, 전북 전주에서 또 반이 도망쳤다. 10여 명의 피난길은 험난한 고행길이었다.

지방호족들의 푸대접은 기본이고 신변의 위협까지 받으면서 나주까지 내려가는 과정에서 현종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