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봄은 조용히 와서 발바닥을 간지럽히고 흰 고무신을 꺼내놓게 만든다. 하지만 도시는 봄이 와도 아픈 아이처럼 미소가 없다. 어느 부유한 집 높은 담장 위에 꽃망울을 터트린 매화는 창백해서 사랑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어느 시인은 의도적으로 우수(雨水)를 우수(憂愁)로 오독하면서 우울 속에 갇혀버린 명랑한 시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하나의 봄일진대 시인들은 왜? 달리 생각하고 엉뚱한 표현들을 가능하게 할까.

매주 수요일 ‘시인 문병란의 집’에서는 시 창작 강의가 펼쳐진다. 동아리 이름이 ‘맬겁시(詩) 왔당께’인데 사연이 재밌다. 바로 앞집에 사는 분을 여러 번 설득해 초청했지만 와서 보니 책 읽고 시를 쓴다고 해서 어리둥절한 나머지 내뱉은 일성이 “내가 여기를 맬겁시 왔당께”이다. 지금은 이분이 가장 열성적이다.

동아리는 동구 주민을 대상으로 하지만 타 자치구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일주일에 하나의 주제를 숙제로 주고 창작해온 작품을 회원들끼리 서로 합평하면서 감성을 키우고 감각을 연마해 간다. 필자는 총평을 통해 마무리 단계에서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고 한 편의 작품이 탄생하도록 만들어 낸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동안 두 권의 문집이 발간됐다. 첫 문집은 『솔찬히 고생했당께』, 두 번째 문집은 『고상혀도, 마음은 보름달이랑께』이다.

필자는 회원들을 통해 인생을 다시 이해하고 반추하면서 한없이 작고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고단한 눈빛과 마른 눈가의 서글픔, 이마와 얼굴에서 드러나는 실오라기 같은 주름살 속에서 생의 질곡을 발견하고 절로 고개를 숙인다.

최고령은 83세, 무릎 관절 수술로 지팡이를 짚고 가장 먼저 찾아온다. 선교사였던 유일한 청일점은 78세, 현재까지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도 있다. 떡 방앗간 주인 68세, 전통 발효주 명인 66세, 마트 주인 60세, 마을 사랑채 자원봉사자 겸 화가 57세, 미술학원 원장 54세, 그리고 최근에 입회한 전직 교육공무원은 63세다.

이분들 앞에서 필자의 시 창작 강의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삶 자체가 이미 시로 물들어서 눈인사만 건네도 금방 시가 쏟아질 것만 같은데 …. 그래서 이분들을 필자는 ‘동구의 시인들’이라 명명해주었다.

최근에 발간된 문집 속에서 회원들의 시적 정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문장들이 있다.

83-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내 고향아, 잘 있어 다오. 78-우리는 당신의 쓸쓸한 마음을 읽을 줄 알아요. 68-은행나무 아래에서 가을 편지를 쓰고 싶다. 66-엄마는 늘 비어있는 의자라서 아무 때나 오렴. 60-행복은 고통을 느낄 때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김종삼 (1921-1984) 시인의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라는 시를 보면, 시가 어디에 있고 시인의 삶은 어떤 흔적과 자취를 보여주는지 대략 알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시집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1982)

시인이 정치를 하거나 정치인이 시를 썼다는 경우는 종종 들어봤지만, 검(劍)을 사랑하는 정치인이 시인의 길을 걷고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왜일까? 이유는 명료하다. 구밀복검(口蜜腹劍)! 그래서 펜은 칼의 동료 시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치게 된다. 친일 문인이나 친독재 성향을 띤 문인들의 말년과 또 사후의 평가를 보면 이들이 모두 구밀복검의 행태를 보여줬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몸은 자유로워도 마음이 얼음덩어리 속에 들어가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불안스러운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