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4시간은 모두에게나 주어지는 공평한 시간이다. 이렇게 아침이면 매일 새롭게 시작되는 하루는 날마다 받는 선물과도 같다. 그렇지만 시간을 단지 ‘객관적으로 흐른다’는 하나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수는 없다. 누구나가 당연히 맞이하는 아침, 점심, 저녁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일어나는 다양한 이벤트와 사건들로 인해서 어느새 시간은 느리게도 혹은 빠르게도 흐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구에게나 공평할 것 같은 시간이라는 선물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각자의 삶도 천차만별로 다양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객관적으로 흐르던 시간은 늘 그렇듯 하나의 사건이 발생함과 동시에 다양한 흐름을 가지고 변주를 하기 시작한다. 마치 사연이 묻어나는 노래를 들으면 예전 기억과 사건들이 떠오르게 되는 것처럼, 시간은 어느덧 과거로 향하고 기억의 강렬도에 따라 그 템포를 맞춰서 어느새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객관적인 시간과 주관적인 시간_크로노스 속에 살아가지만 카이로스를 알아차릴 지혜 갖춰야

그리스 신화에 시간을 형상화한 신은 두 명이 등장한다. 바로 절대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Khronos)와 주관적 시간을 말하는 카이로스(Kairos)다. 이 두 신들의 이야기는 시간에 대한 고대인들의 흥미로운 사고를 살필 수 있는 부분이다.

먼저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습은 백발이 무성한 할아버지의 형상으로 낫을 들고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 더해 떠오르는 장면은 자식들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신탁이 두려워서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허겁지겁 집어삼키고 있는 어마무시한 모양새다.

결국 신탁대로 막내였던 제우스에 의해 거세당한 그는 북쪽으로 추방당하고 만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의 뱃속에서 토해내진 아이들은 순서가 뒤바뀌어 제우스를 필두로 서열이 정리되고, 이내 시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갖춘 신이 된다.

첨부된 작품 ‘큐피트의 날개를 자르는 크로노스’에 등장하는 크로노스도 아이를 잡아들고 있지만, 조금 독특하다. 그가 잡은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닌 바로 사랑의 신 에로스이다. 게다가 가위를 들고 그의 날개를 자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피에르 미냐르 作 ‘큐피트의 날개를 자르는 크로노스’ <위키피디아 검색>

무슨 이유로 사랑의 신 에로스는 시간의 신에게 잡혀 날개가 꺾이고 있는 것일까?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서도 볼 수 있듯 에로스는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머릿속 이성과 냉철한 사고를 압도하며 다리의 힘을 마비시키는 신”이라 정의되고 있다.

어찌보면 세상 어떤 무엇도 에로스를 대적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미인데, 이 천하무적을 제압해 날개를 자른다는 것은 결국 사랑의 신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시간의 신밖에 없다는 말과도 같다.

반면 또 하나의 시간의 신 카이로스는 조금 독특한 형상으로 등장한다. 무성한 앞머리에 비해 민머리인 뒷머리를 가진 매우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비롯해 등과 발에 달린 날개까지 그 오묘함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그는 왜 이런 모습을 하고있는 걸까? 이태리 북부 토리노의 한 박물관 카이로스 조각상 아래 새겨진 글귀를 살펴보자.

“내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 또 사람들이 나를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면 다시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어깨와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다. 손에 들고 있는 칼과 저울은 나를 만났을 때 신중한 판단과 신속한 결정을 하라는 뜻이다. 내 이름은 카이로스! 지금이 바로 기회다!”

이탈리아 베키오 궁전 벽화에 등장하는 카이로스 <위키피디아 검색>

절대적인 시간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시간의 개념을 알려주는 시계와 달력을 통해 알 수 있는 시간이다.

이와는 반대로 상대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는 개별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의 흐름을 말하는데 따라서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이라고도 하고, 어떤 행동을 위한 적절한 시간을 의미하기에 계절을 가리키기도 한다.

조각상에 새겨진 글귀처럼 작품 속에서도 볼 수 있는 카이로스의 독특한 헤어스타일은 앞머리는 산발로 풀어 헤쳐져 있어서 손으로 잡히게 생겼지만, 뒷머리는 대머리라서 결코 붙잡을 수 없게 되어있다.

이는 정해진 시간은 매 순간 매초 일정하게 흐르지만 그사이 어느 순간 당도한 상대적 시간이라 할 수 있는 기회와 적절한 타이밍을 꽉 잡을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읽어볼 수 있다.

이처럼 자신에게 온 행운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준비를 미리 해 둔다면 여신은 언제나 당신의 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온다. 하지만 빨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놓치면 다시 붙잡기는 힘들기에 기회를 포착하게 되면 빠른 결단 또한 필수이다.

기회를 찾아 시간 토끼가 이끄는 그 곳으로 과감하게 뛰어들 수 있는 용기있는 한 해가 되길…

시간이 흐름을 거스르는 시점은 뭔가 큰 사건을 통해서이다. 삶 속 가장 커다란 변동은 아마도 자아를 적립해가는 시기에서 발생하고는 한다. 물론 그 시기를 지나서도 삶 속에 여러 이벤트들이 종종 생성이 되기는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시기’는 가장 중요한 변화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잘 설명해 주는 동화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있다. 시계 토끼를 쫓아 토끼굴에 뛰어든 앨리스는 몸이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하는 괴기스러운 세상에 도착한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현실 세계에서보다 더 자유를 느끼게 되고 그동안 담아 뒀던 질문들을 마음껏 던지며 본격적으로 자아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앨리스가 살았던 빅토리아시대, 소녀들의 사회에 대한 호기심은 정신병이었다. 그러나 용감한 앨리스는 시계 토끼를 쫓아 토끼굴에 뛰어들었고, 온갖 괴상망측한 일들을 이겨내고 스스로 성장을 이뤄낸다.

이두환 작가의 작품 ‘일탈을 꿈꾸는 L씨’에서도 동화 나라에 등장할 것 같은 커다란 주황색 중절모에 넥타이를 맨 빨간 눈의 토끼가 등장한다. 동화 속 시계 토끼와 오버랩되는 이 작품 속에서도 작가의 성장 서사를 읽어볼 수 있다.

작품 속 동물에 투영된 이는 타지에 와서 예술가로서 생활하며 정착하기 위해 한참이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 작가의 자화상이다. 또한 일탈을 꿈꿔야만 하는 L씨로 의인화된 토끼에는 거친 사회 속 현대인들의 상처받은 초상까지도 함께 담겨있다.

타자와의 관계 맺음을 통해 나 자신을 인식해가는 과정을 주로 작품의 주제로 삼는 작가는 나 자신과 타인의 이해를 지향하는 ‘즉자대자적’(卽自對自的) 상태를 늘 고민한다.

또 다른 차원의 나, 마치 시계 토끼처럼 의인화된 L씨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현대인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겠다. 녹록치 않은 삶이지만 L씨는 일탈을 꿈꾸며 그래도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 희망을 찾아 그 굴속으로 뛰어들고자 준비 중에 있는 것이다.

“희망은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새벽은 올 것이다. 기다리고 보고 일하라. 포기하지 말라”.- 엔 라모트- <이현남·전남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