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배운 컴퓨터가 이젠 유일한 내 친구가 되었다. 컴퓨터는 넓은 세상을 보게 하고 내 삶에 활력도 준다. 요즘 들어 컴퓨터에 푹 빠지게 된 건 낯익은 한 이름에 팔려서이다. 오늘도 집안일을 대충 끝내고 컴퓨터 앞에 앉아본다. K란 사람이 또 어떤 작품을 갖고 나왔나 해서다. K, 그는 내가 처녀 때 알았던 사람이다. 안다고 해야 먼발치에서 얼핏 모습만 보았을 뿐 마음 담은 편지 한 장 띄운 적이 없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가슴 조이며 컴퓨터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건 아직도 잊히지 않은 생생한 그의 사연 때문인지 모른다.

사십여 년 전 그는 내게 일곱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첫 편지는 방과 후 도서관에 들렀다가 월간지 여원(女苑) 독자 문예란에 실린 나의 글을 읽고 보낸다는 것이었고 마지막 편지는 영을 알게 된 후 몇 달 동안 써두었던 일기장을 불태우며 쓴 편지라고 했다. 내가 그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나마 보게 된 건 마지막 편지를 받기 열흘 전이었던 것 같다.

“자야 너 김 선생님이라고 잘 아니? 그 사람 지금 우리 가게에 와있는데 널 좀 만났으면 하는구나.”

“아니 그럼 우리 집 대문을 기웃거린 아까 그 사람이...? 당숙모님, 그냥 나 없다고 하세요.”

나는 그날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방안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그 사람의 편지를 아끼면서도 답장 한 번 보내지 못한 건 엄하신 아버지의 불호령과, 동네 사람들의 입소문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물 흐르듯 살아왔지만 코스모스 핀 계절이 오면 티 없었던 그 시절들이 향수처럼 가슴에 저며 오곤 한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 인터넷 어느 사이트를 찾아 나서다 그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동명이인이겠지 하면서도 낯익은 이름은 나의 뇌리를 뱅뱅 돈다.

‘문학을 좋아한 교사라고 했으니 어쩌면 정년퇴임 후 이런 좋은 취미생활을 즐기는지도 몰라. 그도 이 시와 예쁜 풍경의 동영상을 작성하면서 어쩜 아름다웠던 젊은 날을 떠 올렸는지도 모르는 일이야.’

자못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아이디를 넣고 클릭을 해본다.

‘아니 이럴 수가!’

나의 상상은 참으로 정확히 적중했다고 생각했다.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꽃밭에 이리저리 고추잠자리가 날고 그 시절에 즐겨 듣던 음악이 꿈결처럼 흘러나오지 않겠는가. 분명코 그는 어제 접속 회원 란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 그 시절의 노래와 배경을 사이트에 싣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몹시 콩닥거렸다. 난 행여 화면이 지워지기라도 할세라 조심스레 응시하며 그 사이트를 즐겨 찾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웬일이야?”

“너 혹시 김 아무개란 사람 알고 있니?”

“아, 그분? 내 선배 언니 남편인데 관청에 근무하다 정년 하셨어. 우리에게 컴퓨터 강의하던 그 선생님이야. 근데 왜 그래 언니?”

“아니 뭐야? 교사가 아니었다구?”

그는 내가 찾고 있는 K가 아니었고 우리에게 컴퓨터 과목을 가르쳐준 선생님 중 한 분이었던 것이다. 순간 동명이인의 허무함에 기대 무너지는 소리가 쿵 하고 귓전을 울렸다. 남의 속도 모른 남편은 등 뒤에서 우리 집에 컴퓨터 박사 한 사람 나오겠다며 동영상의 가을 풍경에 감탄한다. 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피식하고 속으로 웃어본다. 내 남편보다 든든한 이가 어디에 또 있으랴 싶지만 무언가 아쉬운 한 조각의 꿈들이 추억 속을 기웃거린다.

마당으로 나와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또 한 번 혼자서 웃는다.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있다더니 가을 한나절의 꿈이란 말인가. K가 보낸 노래 ‘에버그린 (Evergreen)’이 창을 넘어와 주변을 맴돌더니 몇 잎 남지 않은 감나무 가지에 걸린다.

컴퓨터는 분명 내 친구다. 음악과 시와 가을 풍경이 화면에 가득하고, 착각 속에서 아름답게 꿈도 꿀 수 있으니.

<윤영자 약력>
▲1997년 ‘수필과 비평’ 등단
▲한국문인협회, 광주·전남문인협회, 장성문인협회 회원
▲전남문학상, 한국여성문학상 수상
▲수필집 : ‘윤이나네 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