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이 미끄러지듯 스르르 고봉 종가를 떠난다. 차를 향한 종손 부부의 정중한 인사, 그 동영상을 보던 나 역시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피붙이의 등에 얹혀있던 묵은 짐이 덜어진 듯 기쁘면서도 한편 서운함이 뒤섞인 이 눈물의 의미는 뭘까?

하필 올해 들어 수은주가 가장 높이 치솟은 날이었다. 10여 명 되는 석학들이 마스크에 위생복을 차려입고 마치 조상의 혼백을 대하듯 엄숙한 손길로 고문서를 다룬다. 지켜보는 내내 저절로 우러나는 존경심이다. 꼬박 한나절 거쳐 정리를 마친 기탁 문서가 802점이나 된다니! 적잖은 상자들이 그동안 머물렀던 종갓집을 떠나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났다. 선인들의 혼이 깃들어 있는 고문서, 고서 등은 최대한 미동을 방지하기 위해 묵직한 트럭으로 운반한다고 한다. 어느 때보다도 더 경건한 종손 부부의 목례 또한 조상님의 영혼과 하직을 고하는 격식 갖춘 하례였으리라.

호남의 거유 고봉 기대승 선생의 선대는 본디 서울에 거주하였다. 그러다 사화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서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에 새로운 터를 잡았다. 예전의 행정구역 명칭은 광곡리(廣谷里)로 ‘광곡’은 순우리말로 ‘너부실’이라 하여 행주기씨가 모여 살았던 마을이며 그곳에 월봉서원도 자리 잡았다. 그동안 크고 작은 전쟁과 재난들을 수없이 거쳤을 텐데 고스란히 보전한 그 정신 또한 문화재에 버금가리라.

‘집안에 값나가는 물건이라고는 ‘孟子’ 일곱 권뿐, 오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200전에 팔아 그 돈으로 밥을 지어 실컷 먹었소. 희희낙락 유득공에게 한껏 자랑을 늘어놓았더니 그 역시도 굶주린 지 오래라, 내 말을 듣자마자 ‘左氏傳’을 팔아 쌀을 사고, 남은 돈으로 술을 받아 마시게 하였소.’ 굶주림은 가난한 서생의 사치란다. 이 하소연 섞인 편지글의 주인공은 단아하고 고고한 성품의 이덕무 선생이다. ‘맹자를 팔아 밥을 해 먹고’라는 제목의 글 속에선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젊은 학인들의 곤궁한 생활상이 드러난 편지글이다. 더구나 서생에게 있어 책은 목숨과 바꿀 만큼 소중한 것. 이 글로 그만큼 힘이 든 것이 장서의 보존이라는 걸 엿볼 수 있으리라.

우리가 목숨 바쳐 지켜내야 할 대표적인 정신문화 유산이 바로 기록이며 일반적으로 고문서, 고서라 불리는 옛날 문헌 자료들이다. 그 귀한 문서의 목판 474매와 ‘기대승 종가 소장문적’ 18점이 1992년에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제22호)로 지정되어 현재 월봉서원 장판각에 소장되어 있다.

2013년에는 숙원사업이던 한역 번역본 ‘고봉선생종가고문헌집’ 5권, ‘주자문록’ 3권, ‘고봉집백선’, ‘고문서집선’이 탄생했다. 마침내 그 고문서들이 안전한 보금자리에 안착하게 되었으니 늦은감은 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고봉이라는 큰 인물에 대한 연구들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면, 이제는 고봉 선생 서세 450주년을 기점으로 고봉과 그의 후손들이 남긴 정신문화나 기록문화유산을 종가가 아닌 ‘(재)호남문화진흥원’이라는 안전한 곳에 보존하고 누구나 쉽게 열람하여 공유한다는 큰 취지가 완성된 셈이다.

오백 년 가까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성심성의껏 모셔왔던 종가의 자긍심일 텐데 갑자기 다른 곳에 기탁하게 된 종손은 어떤 심정일까? 태어날 때부터 종손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그 기나긴 세월 크고 작은 난리를 겪으며 얼마나 전전긍긍했을까? 80 평생 정성을 다한 기성근 종손에게 바통을 받은 아들 기형일 군이 17대 종손 자격으로 기탁 문서에 사인을 했다고 한다.

“너에게 큰 짐을 짊어주었구나. 적당한 짐은 휘청거림을 막아주므로 올바른 걸음걸이에 도움이 된단다.”라며 김길자 종부가 무거운 짊을 짊어진 아들의 등을 토닥여주었다는데, 맞아. 예로부터 종부는 하늘이 점지한다고 했지. 명문 종가의 안성맞춤 종부임에 틀림없다.

‘남겨야 한다, 지켜야 한다, 그리고 전해야 한다.’ 오늘 시청한 동영상의 구호처럼 조상님이 남긴 귀중한 유물을 자손들은 한 치 훼손 없이 올곧이 지켜내야 하며, 내리 내리 대물림을 하는 것이 종갓집에 부여된 막중한 의무였다. 이제 그 중차대한 책임을 무사히 완수하고 한 발 물러서는 고봉 종가 16대 종손 부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값진 눈물 흘려주어서 고마워”

종부의 이 말 한 마디가 내 눈시울을 다시 적신다.

<이정선 약력>
▲‘한맥문학’ 등단
▲현 영호남수필문학협회 상임이사, 국제펜 광주지회 이사
▲허균문학상, 영호남수필문학 대상 수상
▲국제펜광주문학상, 광주문학상 수상
▲수필집 ‘원의 버릇’ 외 2권, 손편지 모음집 ‘두근두근 손편지’
▲‘이정선 點化시집’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