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진실화해위와 우분투
김진수
본사 서울취재본부장
2020. 05. 26(화) 19:49 가+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8일 열린 ‘5·18 40주년 기념식’ 기념사에서 “(가해자들이) 이제라도 용기를 내어 진실을 고백한다면 오히려 용서와 화해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밝히면서 진상규명의 한 방법론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 모델을 제시했다.

이어 청와대 강민석 대변인도 “남아공 진실화해위는 공소시효를 배제하고 1960년부터 자행된 사건을 조사했다. 7천112명을 조사해 상당수가 처벌을 받았지만 849명이 사면을 받았다”며 “진실 고백과 용서, 화해에 부합하는 결과”라고 부연해 문재인 정부가 남아공의 진실화해위 모델을 5·18 진상규명의 해법으로 고려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1995년 설립돼 1998년까지 활동했던 남아공의 진실화해위는 극단적인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관련 조사를 담당했다.

남아공은 소수의 백인 지배 세력이 다수의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피지배 세력들을 착취하는 구조적 틀을 구축했다. 백인들은 지배와 착취에 필요한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법과 제도를 통한 국가권력을 이용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이전 시기에는 이주민인 백인이 원주민인 흑인과 비백인의 권리를 침해했고 1948년부터 1994년 사이에는 인종차별정책을 실시하여 인종집단간 깊은 분열이 자리 잡았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남아공의 폭력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정책은 인종우월주의에 기반한 소수 백인의 욕망을 실현하도록 사회 시스템을 구축했다.

진실화해위의 설립 목적은 기본적으로 진실과 화해를 통한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이었다. 진실화해위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이 위원회가 남아공의 민주주의를 이행시키는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과 기능을 담당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사회통합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려 했던 점, 사회적 하부구조를 개혁시키려 했던 점, 사회경제적 모순을 약화시키려 했던 점 등은 명백히 진실화해위의 공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물론, 일부 학자들은 남아공의 과거사 정리정책도 부족한 점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사회적 하부구조의 개혁이 위원회의 권고안에 그치거나, 부분적인 수준에 머물러 총체적 차원의 정부정책으로 수립·집행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남아공의 과거사가 곧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노동착취와 긴밀하게 연계돼 있었다는 점에서 정부가 흑인들의 노동권 및 생활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국가폭력 및 인권유린의 전체 사건 중에서 약 42%만을 위원회가 조사했고 나머지 58%의 사건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것으로 전해진다.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를 언급할 때 반드시 따라오는 개념이 바로 ‘우분투(ubuntu)’다.

‘우분투’라고 하면 컴퓨터에 친숙한 젊은이들은 한 영국 기업이 개발·배포한 컴퓨터용 리눅스 운영 체제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분투는 상호의존과 공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의 가치체계이며 세계관이다.

용서와 화해를 의미하는 우분투는 남아공의 인종차별과 그에 따른 갈등을 치유하는 독특한 평화 추구의 대안으로 이해됐고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구현됐다.

우분투는 인종차별시절 백인들이 국가의 유지를 위해서는 사람을 죽이거나 고문해도 된다는 반인권적인 생각으로 흑인들을 핍박한 과거사를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의 증언 듣기, 피해자 유골 발굴 등으로 철저하게 밝히는 한편 가해자들이 잘못을 고백하고 뉘우치면 사면함으로써 극복하게 했다.

실제로 흑인들의 인종차별 폐지 투쟁을 국가폭력으로 탄압한 보안군 출신 가해자가 법정에서 아프리카 민족회의 활동가를 살해한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자, 방청석의 흑인들이 용서의 뜻으로 박수를 보낸 사례가 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사에서 밝힌 “이제라도 용기를 내어 진실을 고백한다면 오히려 용서와 화해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발언도 일종의 우분투로 해석된다.

오랜 세월에 묻혀 자칫 진상규명이 물 건너 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진실 고백을 전제로 가해자들에게 먼저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이날 갑자기(?) 내민 남아공 진실화해위 모델과 우분투 ‘카드’는 우릴 다소 혼란스럽게 만든다. 앞뒤가 바뀐 느낌, 혹은 중요한 무엇인가를 빼먹은 채 다소 서두르는 느낌인 것이다.

말바우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시민들의 말처럼 전두환과 그 패거리들은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대가리 빳빳하게 쳐들고’ 다니고 있는데, 광주가 먼저 남아공 진실화해위 모델이나 우분투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 광주는 더 냉정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5·18의 가장 핵심적 진실인 집단발포 명령자가 누군지 여전히 조직적으로 은폐되고 있는 상황에서 먼저 화해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확실한 단죄로 역사의 정의를 세우는 길에, 광주는 흔들리지 말고 꼿꼿하게 앞장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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