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들이 자주 쓰는 말 가운데 ‘등정(登頂)주의’와 ‘등로(登路)주의’란 말이 있다. 등정주의란 정상에 오른 그 결과가 중요하다는 것이고, 등로주의는 등정이란 결과보다 오르는 과정을 중시하는 관점이다.

등로주의자들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지 않고 남이 이미 개척한 루트를 따라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은 별의미가 없다고 본다. 이미 나있는 길을 따라 히말라야에 오르는 것이라면 현지 안내원인 셸파(Sherpa)를 능가할 산악인은 없다는 것이다.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 오은선 대장을 비판하는 일부 유럽 산악인들의 관점은 이 등로주의에 기초한다.

정치는 히말라야 등정기 이상의 다큐멘터리다. 각본도 감독도 없다. 유권자들은 그런 다큐를 보고 아주 드물지만, 감동한다.

유신독재 시절 박정희라는 거대한 겨울공화국에 도전한 ‘인동초’ 김대중을 통해,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낙선이 확실한 부산 출마를 결행한 ‘바보’ 노무현을 통해 감동의 전율을 공유한다. 감동의 공유는 어떤 벨트를 형성하기 마련이고, 그 벨트는 흔들리지 않는 정치적 자산으로 성장한다. 광주·전남 사람치고, ‘포스트 DJ’에 대한 열망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DJ 이후 우리는 본능적으로 광주·전남을 상징할 만한 정치적 리더를 찾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과연 누굴까? 광주·전남의 이름으로 한국의 대표 정치인이 될 사람은? 혹은 호남의 이름으로 세계적인 정치인이 될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예컨대 영남은 박근혜도 있고, 아무개도 있는데 우린 어디에서 DJ의 정치적 계승자를 찾아낼 것인가?

‘포스트 DJ’를 꼭 광주·전남에서 찾을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웃집 손자가 아무리 잘나도, 못난 내 손자만 못한 것 아니던가. 광주·전남의 유권자라면 시장, 도지사, 국회의원 같은 지역 출신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포스트 DJ’에 대한 희망을 찾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전남도지사를 2번이나 연임하고 이제 3선에 도전하고 있는 박준영 지사는 주목받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일 수밖에 없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주지사를 역임한 뒤 당장 차기 대권 주자로 발돋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민주당의 텃밭이라는 지역적 정치현실을 감안하면, 그의 3선은 별 어려움 없이 성취될 전망이다. 박 지사가 ‘3선’이란 고지의 정상에 오른다면 그의 가족, 그의 보좌관, 그의 캠프에서는 환호와 감동이 클 것이다.

그러나 그 감동은 근접의 영역에 그칠 뿐이다. 경쟁 없이 쉬운 길을 걸어온 그의 ‘3선’에 김대중, 노무현식 감동을 받을 유권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준영 지사와 주변의 지지자들은 ‘3선’을 통해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임기도 보장받고, 일정 수준의 명예도 따라올 것이다. 그러나 ‘얻을 것’만 보고 ‘잃을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의 3선은 ‘포스트 DJ’를 갈망하는 지역 여론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박 지사의 등정주의가 ‘포스트 DJ’를 희망하는 지역의 많은 정치인들에게 등로주의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된다면, 그의 땅 짚고 헤엄치기식 3선도 무조건 아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글쎄, 필자가 냉정한 정치현실을 다소 로맨틱하게 해석하고 있는지 도 모르겠다.

/서울취재본부 국장 jskim@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