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짧았을지라도 외갓집에서 지냈던 소년기는 참으로 소중하다. 그 시절의 일은 기억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내 그림의 기조가 되었다. 넓지 않았지만 밭의 어느 이랑쯤, 아마도 가장자리였으리라. 미루나무가 서 있었다. 땀 흘린 농부에게 잠시 그늘 막이 되어주었다. 바람에 흩날리며 나무 이파리의 신기한 반짝임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햇볕 쨍쨍한 한 낮엔 상상할 수 없는 그늘이 해질녘에는 산허리를 길게 감싸고 돌았다. 밭이랑 사이에 남겨진 긴 그림자는 때론 기호 형태를 띠었다.

소년기를 떠올릴라치면 그 긴 그림자가 잔상이 되어 기억더미에서 솟아나곤 한다. 그 시절의 기억에서 퍼올린 기호적 이미지가 간간이 내 캔버스에서 재창조될 때도 있다.

요리 삐뚤 조리 빼뚤, 정형화 되어 있지 않은 들판에는 계절마다 달라지는 생명체들이 숨을 쉬며 색다른 풍경을 남겼다. 아직도 눈에 선한 그 시절의 정경들이 내 캔버스에 요동치며 나를 부르곤 한다. 그러나 정작 붓을 들면 어디론가 도망쳐 버린다. 아쉽다.

내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다시는 갈 수 없는 그 시절과의 만남이다. 그 시절로 흠뻑 빠져 들어 그림을 그릴 땐 행복해진다. 그리고 다 그려진 결과물보다는 그려지는 과정이 더 소중하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을지라도 캔버스 안에서 그 시기를 조우하는 동안 눈물이 날 정도로 큰 희열을 느낀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잡을 수 없는 그 시절의 일들을 만나며 나는 한없이 슬퍼진다. 세월이 나를 스쳐지나 가고 있다. 저 멀리 아스라이. <경기도 양평에서 화가 신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