挽宮媛(만궁원) / 안분당 이희보
굴궐 문 잠기우고 달뜨는 황혼인데
열두 번 종소리가 밤에야 분명하다
청산에 뼈를 묻었나 잎새 소리 못 듣네.
宮門深鎖月黃昏 十二鐘聲到夜分
궁문심쇄월황혼 십이종성도야분
何處靑山埋玉骨 秋風落葉不堪聞
하처청산매옥골 추풍낙엽불감문

궁녀의 직업은 천한 쪽으로 분류된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가정을 둘 수도 없었다. 나인 내시들과 그 아래 하역을 맡은 무수리(水賜)·각심이(방아이)·방자(房子)·의녀(醫女)·손님이라 불리는 여인들이다. 그러나 보통 궁녀라 하면 상궁(尙宮)과 나인으로 분류되는 인구의 여인이다. 시인은 궁녀의 죽음 소식을 들었던 모양이다. ‘궁궐 문 깊이 잠기고 달이 뜨는 황혼인데, 열두 번 친 종소리가 밤에 이르러 소리가 분명하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가을바람 쓸쓸히 지는 잎새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挽宮媛)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안분당(安分堂) 이희보(李希輔:1473-1548)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연산군 때 홍문관수찬·이조정랑·내수사별제 등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1536년 대사성 동지가 됐다. 그 뒤 대호군·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냈고, 문장에도 능하였다 한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궁궐 문 깊이 잠기고 달이 뜨는 황혼인데 / 열두 번 친 종소리가 밤에 이르러 분명하군 // 어느 청산에 옥 같은 뼈를 묻히리까 / 가을바람 쓸쓸히 지는 잎새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궁녀의 쓸쓸한 죽음을 애도하는 시’로 번역된다. 태어나면 죽는 것은 정한 이치다. 한 밤에 궁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민의 정을 느낀다. 화사한 자태는 어제인가 했더니 오늘은 싸늘한 시신으로 변했다. 그렇지만 목 놓아 울어 줄 사람도 없고, 딱히 뼈를 묻힐 만한 곳도 없다. 가엾은 신세다. 때마침 추풍낙엽이 날리는 그런 소리를 듣는다.

시인은 이와 같은 시상의 밑그림 속에 울컥하는 마음으로 한 여인의 한 많은 생에 대한 시심을 일궜다. 궁궐의 문은 깊이 잠기고 달떠서 이제 황혼인데, 열두 번치는 종소리가 밤에 이르러 분명하게 들린다고 했다. 열두 번 쳤다면 자정을 알렸겠지만, 죽음도 알렸으리. 한 궁녀의 애달픈 삶이 마감되었음을 뜻하리라.

화자는 눈을 감은 지금 뒷사람도 없는 마당에 다음 세상을 생각해 보인 시상이다. 어느 청산에 옥 같은 뼈를 묻었는가를 탄식하면서 오늘 가을바람만이 지는 잎새 소리를 차마 듣지 못하겠다고 했다. 지는 가을에 잎새 소리와 궁녀의 안타까운 운명을 대비하는 시상의 멋을 만나게 된다. 기구한 또 하나의 생명이 자취를 감추는 엄숙한 순간이다.

※한자와 어구

宮門: 궁궐의 문. 深鎖: 깊이 잠겼다. 月黃昏: 달은 황혼이다. 十二鐘聲: (자정에) 열두 번 친 종소리. 到夜分: 밤에 이르러 분명하다. // 何處: 어느 곳. 靑山: 청산. 埋玉骨: 옥골을 묻다. 秋風: 가을바람. 落葉: 낙엽. 不堪聞: 차마 듣지 못하겠네. 이 한마디가 시인의 심정을 토로하는 말이리라.

<시조시인·문학평론가(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