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적막조차 물러선 어스름에
맹인할아버지 길섶을 떠듬떠듬 찍고 있다
등뼈 휜 어둠의 무게 교차로에 길을 내고
바튼 숨 쿨럭이며 허공을 둘레거릴 때
직립의 지팡이 날이 바짝 들어선다
헛짚어 발목 삔 세상도 서릿발을 일으킨다
실그러진 뭍살이 온몸으로 끌고 간다
한 땀씩 손끝으로 덧대은 길 위의 길
신새벽 그 길을 따라 돋을볕을 도두밟는다
(시집 ‘일요일은 일주일을’, 고요아침, 2015)

[시의 눈]

낯선 곳을 갈 때 내비게이션이 없음 찾아가기 어렵지요. 시각장애인의 흰 지팡이가 ‘내비게이션’이란 시를 읽으며, 나도 자판의 음소를 내비인 듯 더듬어 갑니다. 자음과 모음을 찾아 치는 이 비둘기 타법은 참 서툰 내비이군요. 바라는 음소 위치를 잊고 ‘사랑’을 ‘자랑’으로 찍기 세 번째라니까요. 할아버지는 ‘신새벽’의 길에 마침 ‘돋을볕을 도두밟’지요. 눈을 훤히 뜨고도 ‘헛짚어 발목 삔’ 사람도 있습니다만, 할아버지는 ‘실그러지’려 하면서도 ‘서릿발’처럼 몸을 세워 가십니다. 지팡이 내비로 운행하는 손엔 당신의 뚜벅이 의지가 전해옵니다. 헬렌 켈러가 영혼의 꽃을 보는 눈, 선그라스 속에 표정 감춘 이용복의 형형한 눈, 그리고 안드레아 보첼리의 ‘사일런트 나이트’ 같은 미성의 눈도 그 내비에 비칩니다. 참, 여의도 꿀단지에 취한 위정자들은, ‘돋을볕’ 보라고 쥐어준 이 할아버지 지팡이마저 내팽개쳤는지, 견지망월(見指望月)격의 저 잘난 손가락 끝만 보고 있지요. 김남규 시인은 충남 천안 출생으로 고려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고,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을 통해 등단했습니다. 시집 ‘밤만 사는 당신’(2019)과 저서 ‘글쓰기 파내려가기’(2019), ‘오늘부터 쓰시조’(2021)를 냈습니다. 그는 사물과 화자 사이에 놓인 심리적 긴장을 야구 배팅처럼 날려내는 젊은 시인입니다. <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