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햇살이 창가에 가득하다. 사랑스러운 봄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선다. 혼자서 가는 곳이야 노상 정해져 있다. 바로 어등산이다. 이젠 며칠 가지 않으면 정인처럼 보고 싶다. 오랜 시간을 같이해 정이 들었을 것이다. 어등산 동자봉대에서 약수터까지 가는 길은 산책코스로 그만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다닌다. 나 역시 이 길을 무척 좋아한다. 어등산은 많은 사람들로 몸살을 앓지만 언제나 포근히 안아 주고 반겨 준다.

추위에 약한 나는 겨울엔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집안에 칩거하다가 꽃샘바람이 잔잔해지면 조금씩 바깥바람을 쏘이기 시작한다. 조심스레 배낭을 메고 어등산을 오른다. 동자봉대로 오르는 길목에는 양옆으로 신우대가 에둘러 있다. 하늘에 못 닿은 인연들이 매듭을 묶고 영겁을 내달아 온 바람 앞에 서걱거리는 모습이 좀 쓸쓸해 보인다. 눈앞을 가파른 언덕이 가로막는다. 이곳을 넘어야만 평탄한 길이 나온다. 일종의 통과의례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던가? 중간쯤 오르자 숨이 차오르고 헉헉댄다. 무엇 때문에 이런 힘든 고개를 넘으려 하는가 후회감이 슬며시 든다. 겨울 동안 너무 편안함에 길들여진 탓일 것이다.

언덕을 넘으며 결코 만만치 않은 내 삶을 생각해 보게 된다. 시련을 잘 견디고 이겨냈다고 치하하고 싶다. 앞으로의 생도 그러하리라. 부유하고 평탄한 길이었다면 어쩜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사는 일이 얼마나 밋밋했겠는가? 삶에는 정답이 없겠지만 굽이치는 물결 속에서 슬픔이 떠나간 자리에 몇 배의 기쁨으로 채워지는 감격은 인생 최고의 환희다. 그런 기쁨도 맛보았고 앞으로의 소망을 간직하며 목적지를 향해서 힘을 낸다. 주어진 고난을 슬퍼 말자. 더 큰 나무로 자라기 위한 자양분이다. 극복하고 나면 내 영혼이 한층 성숙해지고 깊어질 것이다.

높은 고개를 넘느라 등허리엔 땀이 촉촉하다. 정자에 앉아 젖은 땀을 식히며 따뜻한 차를 마신다. 정신이 맑아진다. 무심하게 흘러가는 흰 구름을 바라본다. 가슴 속에 쌓인 근심거리들이 한꺼번에 녹아진다. 무엇 때문에 욕심을 부리고 가슴 졸이며 강퍅하게 살아왔던가? 따지고 보면 대부분 나의 욕심이 내 마음에 상처를 냈던 것 같다.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혜안이 열린다.

예전에 친구를 초대해서 어등산에 오른 적이 있다. 자랑을 했더니 오고 싶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산에서 내가 받은 감동을 친구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정다운 사람과 공감대를 형성하면 더 가까워질 것 같았다. 날짜를 잡은 날, 산 인근에서 채소와 나물로 소박한 점심을 먹고 산에 올랐다. 혼자 오를 때보다 기쁨이 배로 컸다. 동자봉대에서 나눈 이야기가 흥미 있고 풍성했다. 자연 속에서 나눈 대화인데 어찌 맑고 풍요롭지 않겠는가? 어등산을 찾은 등산객들의 얼굴 표정들도 화사하니 밝기만 했다. 산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반가웠다. 친구가 간식으로 가져온 방울토마토가 입안에서 상큼하고 알싸했다. 우린 서로 바라보다가 그냥 웃었다.

친구들과 올라도 좋지만 어등산은 혼자여도 좋다. 주변이 아기자기해서 하나도 외롭지가 않다. 솔가지를 흔드는 바람, 바위, 풀, 꽃 등이 마치 친구 같다. 자연을 만끽하다 보면 명상하는 기분이 든다. 약수터로 가는 길은 부드러운 흙길이라 밟는 감촉이 너무 좋다. 나는 신발을 벗어서 손에 들고 맨발로 거닐기도 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나뭇잎 사이로 하늘빛이 청아하다. 자연의 수런거림에 기분이 업 된다. 이런 곳에 늘 마음을 두며 살고 싶다.

한결 순해진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힌다. 꽃가지마다 물이 오른다. 얼마 안 있으면 꽃봉오리들이 여기저기 피어날 것이다.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한국여성문학상, 광주문학상 외
▲광주문협 회원, 생오지 소설문학회 회원
▲저서 : 소설집 ‘종이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