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구 박사 漢詩 향기품은 번안시조(423)
밤이 오자 홀연히 맑은 향기가 저리 움직여서
2021. 08. 29(일) 19:34 가+가-
雪後(설후) / 태재 유방선

섣달 눈이 마을에 아직도 녹지 않아
사립문을 누가 기꺼이 서로 두드릴까
홀연히 향기 움직여 매화 핀 것 알았네.

臘雪孤村積未消 柴門誰肯爲相鼓
납설고촌적미소 시문수긍위상고
夜來忽有淸香動 知放梅花第幾梢
야래홀유청향동 지방매화제기소

눈이 오면 온 산이 하얀 옷을 입는다. 세상이 하얗게 옷을 입고, 경건한 태도를 갖춘다. 난고의 시상을 빌면 황제가 붕어했는지 상복(喪服)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도 있다. 따스한 햇볕이 비춰 지붕에서 눈이 녹아내리면 처마의 낙숫물은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황제님의 죽음을 애도하면 흘린 눈물 이련가. 섣달의 눈이 외로운 마을에 쌓여 아직 녹지 않았고, 저 사립문을 누가 기꺼이 서로 두드리겠는가라고 물으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밤이 오자 홀연히 맑은 향기가 저리 움직여서(雪後)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1388-1443)으로 조선 전기의 문인이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 등을 친히 보내어 학문을 물어갔고, 사림(士林)들은 이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사례로 대했다 한다. 또한 태제가 경제에 밝음을 깊이 깨닫고 크게 등용하려던 논의를 하던 차에 불행히 병들어 사망했다 한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섣달의 눈이 외로운 마을에 쌓여 아직 녹지 않았고 / 저 사립문을 누가 기꺼이 서로 두드리겠는가 // 밤이 오자 홀연히 맑은 향기가 저리 움직여서 / 차례로 몇 가지에 매화가 핀 것을 알았다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눈이 온 뒤에는]로 번역된다. 눈 온 뒤의 자연 변화에 깊은 관심이 많았던 시상이 더러 있다. 더러워진 주위가 깨끗해졌다는 시상이 있는가 하면, 온 세상을 하얗게 수놓아 온통 흰 옷을 입었다는 시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군이 돌아가시어 온 나라가 상복을 입었고, 태양의 곡에 의해 처마 밑에서 눈물을 흘리더라는 시상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시인의 시상은 달랐다. 눈송이를 밟고 서서 매화가 애잔하게 피어 있음이란 시상의 주머니를 매만지고 있어 독특한 맛을 자아낸다. 섣달의 눈이 외로운 마을에 쌓여 아직 녹지 않아서, 사립문을 누가 기꺼이 서로 두드리겠는가라고 했다. 눈에 갇힌 마음을 연상하는가 싶더니만 외딴 마을에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한다.

화자는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마을이지만 그래도 반갑게 찾아온 손님이 있었으니 반가운 매화였음을 시통에 야무지게 묶어 두었다. 밤이 오자 홀연히 맑은 향기가 하나 둘씩 움직여, 차례로 몇 가지에 매화가 핀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나마 반가운 손을 맞이하는 화자의 반가운 손짓이나마 온기 넘치는 마을의 분위기였겠다.

※한자와 어구

臘雪: 섣달의 눈. 孤村: 외로운 촌마을. 積未消: 쌓여 녹지 않았다. 柴門: 사립문. 誰肯: 누가 기꺼이. 爲相鼓: 서로 (사립문을) 두드리다. // 夜來: 밤에 오다. 忽有: 홀연히 있다. 淸香動: 맑은 향이 움직이다. 知放: 놓아줌을 알다. 핀 것을 알다. 第幾梢: 몇 가지가 (필) 차례다. <시조시인·문학평론가(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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