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말의 대미를 장식한 영화로 ‘매트릭스’ 3부작(Matrix trilogy)을 빼놓을 수 없다. 1999년 첫 편이 개봉된 이 영화는 돌이켜 보면 21세기를 예고하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인상적인 것은 암울하게 묘사되긴 했지만 메타버스(meta-verse)가 현실화된 세계를 보여준 점이다. 영화에서 인류는 기계의 노예가 돼 매트릭스라는 이름의 가상의 세상을 살고 있었으며, 그 가상의 세계가 현실세계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유사한 메타버스의 세상이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2009년작 영화 ‘아바타’(Avatar)도 현실과 구분이 모호한 메타버스의 세계를 그렸다. 아바타는 나의 분신으로 메타버스의 세상에서 싸우고, 피를 흘리며, 사랑을 나눈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Inception)은 꿈의 세계를 다루면서 가상현실과도 같은 꿈의 특성을 탐색한다. 꿈을 공유한다는 개념이나 꿈속에서의 시간이 현실세계와 다르게 흐르고,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 등에서 이 영화는 사실 메타버스의 특성을 탐색하는 영화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메타버스의 세상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현실을 넘어선 세상이다. 현실에서 가능한 모든 인간활동이 메타버스에서도 구현 가능하다. 그러나 메타버스는 현실 그 이상이다. 디지털로 구현된 가상 세계라는 점에서 상상력을 동원해 물리적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힘과 현상을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다.

2003년에 시작해 인터넷에서 화제를 모았던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라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사이트는 메타버스의 원조쯤 되는 프로그램이다. 이 사이트에서 캐릭터는 현실과 유사하게 구현된 3차원 가상세계를 살아간다. 사람들과 만나고, 거리를 걸으며 대화하고, 아름다운 장소를 여행한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거나 클럽에서 함께 춤을 출 수도 있다. 물건을 만들거나 건축물을 지을 수도 있다. 이렇게 만든 물건이나 건축물을 판매하여 돈을 벌 수도 있다. 실제로 세컨드 라이프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현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캐릭터가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디지털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기술을 바탕으로 메타버스는 점점 더 현실과 유사하게 구현될 것이다. 뇌 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전기적 신호로 물리적 세계를 인식한다. 시각과 청각 등으로 들어오는 외부의 정보를 바탕으로 외부 세상에 대한 이미지를 뇌 속에 구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타버스의 세상이 인간의 뇌 속에서는 현실 세계와 구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현실과 더욱 유사하게 구현될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인류가 점차 메타버스에 흥미를 갖는 것은 편리할 뿐 아니라 재밌고 유용하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물리적 제약으로 많은 수고와 노동을 통해 이뤄지는 일들이 메타버스에서는 비교적 간단하게 이뤄진다. 인간이 원하는 대로 형상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인간이 하늘을 날고,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이 영화나 게임에서만 가능하던 활동들이 메타버스에서는 간단하게 이뤄진다. 이러한 편리성, 유용성, 경제성을 바탕으로 메타버스 세상은 더욱 확대될 것이 분명하다.

메타버스는 이제 공연예술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한 유명 보이밴드는 게임 속 가상세계에서 성공적으로 공연을 진행하여 공연예술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의 한 대중음악 그룹은 3차원 가상공간에서 관객 1천만 명을 모아 공연을 펼쳤고 2백억 원대의 수입을 올렸다. 그토록 많은 숫자의 관객이 일시에 모이는 것은 물리적 세계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메타버스의 경제적 파급효과와 위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연극이나 오페라, 발레, 뮤지컬 등의 전통 공연예술도 장차 메타버스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텔레비전 발명으로 라디오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절대적인 사회변화의 흐름을 비켜 가기는 어려웠다. 마찬가지로 메타버스가 점차 위력을 발휘하는 세상에서 공연예술은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