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해본 경험은 누구나가 있을 것이다.

새해가 되면 새로 장만한 다이어리에 비록 작심삼일이 될 약속일지언정 한 해 동안 이루고자 하는 다짐들을 적는 일들을 다들 한 두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주하는 선택의 순간에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자신과의 약속을 한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약속을 어겨본 경험 또한 있을 것이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조금은 무게감이 있는 약속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약속을 지키고자 노력하며 살아가지만 어쩔 수 없이 지키지 못할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를 마주칠 때도 있다.

조금 황당했던 필자의 경험은 약속 시간에 늦게 나타난 친구와 투닥거리다가 발생한 일이다. 늦게 나타난 것도 기분이 썩 좋지 않은데 거기다 대고 ‘약속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라며 홧김에 뱉은 오리발에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물론 화가 나서 엉겁결에 한 말이라고 생각은 되지만 처음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아니 그걸 말이라고…’라는 생각과 함께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약속이란 키워드는 ‘지키거나’ 혹은 ‘지키지 않거나’라는 조건과 늘 함께 붙어 다니며 우리 곁에 존재한다. 양날의 검과 같은 조건을 늘 가지고 다니는 약속이란 과연 무엇일까?

약속(約束), 한자로는 約(맺을 약)·束(묶을 속). 그대로 풀이해보자면 ‘맺고 단단히 묶는다’는 뜻이다. 또한 영어단어 ‘Promise’도 Pro(미리)+mise(보내지다)로 ‘앞서 보내진’이라는 뜻인데, 결국 둘 다 의역해 보자면 ‘어떤 결정을 내리기로 미리 마음을 정하다’ 쯤으로 해석해 볼 수가 있겠다.

사전적 정의로도 다른 사람과 혹은 스스로가 앞으로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해 둔다는 의미를 가지기에 약속은 일방적이라거나 혹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부담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가 만든 작은 약속에서부터 나라 전체로까지 이야기가 가능한 커다란 약속까지 범위도 다양한 키워드 약속.

첫 번째로 어쩌면 ‘자기 자신과의 약속’과도 통하는 흔히 말하는 대쪽같은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는 문인화(文人畵)를 살펴보도록 하자.

송대의 화론가 등춘(鄧椿)의 미학에서 제시된 문인화의 정의를 보자면 “문인화라는 것은 그림이 문(文)의 극치에 있음”이라 해 무엇보다도 그림에 담긴 ‘서권기’(書卷氣)를 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문인화는 다른 그림과는 다르게 기교를 통해 표면적 아름다움을 나타내는데 가치를 둔다기보다는 자신의 심중에 담긴 것들을 표현하는 것에 비중을 두는 그림이다.

그렇기에 문인화 속 그림과 글들은 무언가 모르게 정갈하고 단정하게 다가오는데, 여기에는 창작자의 의도 즉, 스스로와의 약속이 담긴 마음가짐이 배어있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 지역의 문인 화가로는 단연 남종문인화의 맥을 잇고 있는 ‘의재 허백련’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는 증조부 되는 소치를 비롯해 미산 허형의 뒤를 이어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 남종화의 맥을 형성한 장본인으로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화가이기도 하다.

특히나 시각을 자극하는 그림이나 마음이 담기지 않은 그림은 귀하게 보지 않았으며 시(詩), 서(書), 화(畵)가 서로 구분될 수 없는 하나이고, 그 진정성은 격조 높은 정신과 올바른 삶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만년에 들며 그가 주로 그렸던 산수화에는 채색을 하는 듯 마는 듯 엷은 담채나 아니면 묵으로만 그려내 선이 부드럽고 소박한 수묵산수화의 특징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짙은 색이 없어서 화사하지 않고 서민적이면서 토착적인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기에 의재의 화풍은 한국적이면서 호남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런 그의 작품 중 선비정신이 가득 담긴 시와 그림을 살펴보자.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이던 중년의 의재산인 시기(1930-50)에서 막 환갑을 맞이한 1951년부터 흔들림 없이 확고한 자세로 원숙한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는 의도인(義道人) 시기로 넘어가던 시기에 그려진 그림에서 그런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의재 허백련 作 ‘어은도’ <위키피디아 검색>

어은도(漁隱圖)라는 제목을 가진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붓으로 거칠게 짓이겨 놓은듯한 모습을 한 나무이다. 그리고 그 앞으로 삿갓을 쓰고 유유히 낚시를 즐기고 있는 은둔자의 태평스러운 모습이 담겨 재미를 더하고 있다.

전체적인 그림의 풍은 격이 다 파헤쳐 버려 그저 어눌한 어린아이의 장난 같기도 혹은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부벽준이다 뭐다 줄곧 전해 내려오던 여러 법칙을 내려놓고 ‘먹이 깨어졌다’라는 ‘파묵’(破墨)의 상태에 도달한 것을 볼 수 있음이다.

그림에 담긴 화제 또한 이 의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중국 당대 시인으로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이백(李白)의 시를 차용해 쓴 글귀는 다름 아닌 산천에 은둔하며 신선처럼 지내는 이의 평화로운 마음을 표현한 시이다. 실제 무등산에 은거하며 오랜 시간을 보내왔던 의재의 삶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朝披夢澤雲 笠釣靑節節/ 조피몽택운 립조청절절

‘아침 일찍 꿈같은 연못의 안개를 헤치고, 삿갓 차림 낚시질에 푸른 물이 아득하네.’

선생은 늘상 ‘이루기 어려운 것은 교(巧)가 아닌 졸(拙)’이다. ‘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와 같은 말들을 언급해 왔었다. 이는 문인으로서의 삶이란 바로 ‘조화로움’에서 온다는 뜻으로, 삶을 버리고 얻는 예술도 대의를 품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 자체가 바로 ‘예술’이라는 것을 노년의 지혜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다음으로는 자신과의 약속을 넘어 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맹세하는 장면을 담아낸 다비드의 작품을 살펴보자. 18세기 프랑스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1784년 작품 ‘호라티우스의 맹세(Oath of the Horatii)’는 플루타크 영웅전에 나오는 로마 영웅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그를 신고전주의의 대표자로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그림 속 장면은 사활을 건 결투에 나가기 전 아버지 앞에서 세 아들이 승리를 맹세하는 장면이다. 완벽한 삼각형 구도와 소실점을 제외하고서라도 다부지게 표현된 세 형제의 근육묘사 등을 통한 실제 같은 인체묘사는 보는 이의 몰입감을 더해준다. 그런데 결의에 가득 찬 부자들의 모습과는 상반되게 깊은 실의에 빠진 아내와 자녀들 모습에서는 목숨을 건 결투에 가족을 보내야 하는 마음이 읽혀져 안타깝게 다가온다. 과연 무슨 사연일까?

로마 왕국과 알바 왕국(Albains)의 영토분쟁 때문에 생긴 전쟁이 끝이 보이지 않자 양측은 더 피해를 보기 전에 대표군인을 뽑아 전쟁의 승패를 가르기로 결정했고, 각 진영에서는 대표를 뽑았다. 이렇게 로마를 대표해 전쟁에 나가게 된 호라티우스(Horace) 형제들을 상대로 출전할 알바 왕국의 대표는 다름 아닌 알바의 영웅 큐라티우스(Curiaces) 형제들이었다.

이현남 <전남대 미술이론 박사수료>

이들은 나라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승리를 맹세했지만, 사실 이 두 대표들은 서로 사돈 관계로 누가 이기고 지든 간에 친정 오빠가 죽거나 아니면 남편이 죽거나 해야 하는 안타까운 결론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호라티우스 형제 둘이 죽고 큐라티우스 형제는 몰살되어 로마가 승기를 잡게 됐지만 양 진영 모두 다 슬픔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호라티우스 형제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약속 앞에서는 한치의 망설임이 없었고 자부심을 가졌으며, 군인으로서 의무를 다했다.

개인적인 것이건 나라를 위한 중차대한 일이건 일상 속에서 비일비재하게 생겨나는 것이 이 약속인 것 같다. 그러나 여러 번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기에 약속이란 하는 것보다는 지키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임엔 틀림없다.더불어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약속에는 지켜지길 바라는 상대방이 늘 존재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흘리듯 했던 약속일지라도 상대방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일단, 필자부터 그림 속 화제 풀이에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커피 한 잔 사겠다고 약속을 했으니지키기 위해 먼저 전화부터 넣어야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