兒子函編予詩文因題其上
(아자함편여시문인제기상)
백운거사 이규보

심지충정 벼른 일 생 한 획을 그었으니
한유와 두보쯤은 지나친 듯 하오만
백 세대 삶 그친 후엔 내게는 무엇인가.
彫刻心肝作一家 於韓於杜可堪過
조각심간작일가 어한어두가감과
假敎百世行之盛 身候浮名奈我何
가교백세행지성 신후부명나아하

한 생을 산다는 것은 허무라는 말로 치장해버린다. 고려에 쌍벽을 겨룰만한 인물이 없다고 할 정도로 숱한 일화를 뿌린 시성(詩聖)이기에 살며시 자기 자만에 빠졌다. 평생을 두고 시를 쓰는 일은 업으로 삼을 만큼 자신 있었다. 한유와 두보까지도 지나쳐왔을 것이란 자만에 빠져 보지만 막상 자기를 되돌아봄은 허무 그 이상은 없었다. 백 세대를 걸쳐 거듭해 읊조린다 해도 삶 그친 후 뜬구름 같은 허명이 내게는 무엇인가 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동국이상국집’이란 제목을 붙이는 까닭(兒子函編予詩文因題其上)으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1168-1241)로 고려의 문신이다. 진사시에 말석으로 급제한 것이 싫어 사퇴하려고 했으나 전례가 없었으므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퇴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22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신분이 낮은 집안 출신인 탓에 10년간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심지 충정으로 벼르고 깎아 생 한 획을 그었으니 / 한유와 두보쯤은 지나쳐 온 듯 하오만 // 가령 백 세대를 걸쳐 거듭해 읊조린다 할지라도 / 삶 그친 후 뜬구름 같은 허명이 내겐 무어란 말이겠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내 시문 엮음은 그 위에 제목을 붙이기 위함이다]로 번역된다. 제목을 상당히 길지만, 앞을 내다보면서 절절함을 부각해 냈다. 바람과 구름은 그 오묘함을 가다듬지 않아도 생겨난 대로 오묘함을 감당하여 자랑할 수 있으나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저 몸으로만 남겨 거쳐할 수 없는 것이니, 보석도 원석 그대로면 보석이라 그 가치를 거론할 수 없음과 같다. 큰 나무도 쓰이기 위해서는 오래 버티면서도 또한 먼저 베어낸다.

시인은 미래지향적인 심정으로 자기의 심회를 유감없어 피력하려고 했다. 심지 충정으로 벼르고 깎았던 한 생(生) 한 획을 그었으니 이것이 한유(韓愈)와 두보(杜甫) 쯤은 지나쳐 온 듯도 할 수는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거장의 시(詩)세계를 이미 지나쳐 온듯하다는 자기만족을 보이고 있어 보인 시상이다.

화자는 절절한 자기만족은 선경으로만 만족하지는 못하겠다는 자기 합리화다. 가령 백 세대를 걸쳐서 거듭하면서 이 원고를 읊조린다 할지라도, 내 삶이 그친 후 뜬구름 같은 허명(虛名)은 도대체 내게는 무어란 말이겠는가를 자문자답해 보인다. 앞의 자만과 뒤의 허무를 지적했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봉오리에 올랐더니 분간키도 어려워라. 시비 소리 들릴까봐 물을 시켜 둘러보네’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한자와 어구

彫刻: 조각하다. 心肝: 마음과 간장. 作一家: 일가를 이루다. 於韓於杜: 한유와 두보에.(비교를 나타냄. 可堪過: 가히 지나쳐 오다. 두 시성의 경지를 넘다. // 假: 가령. 敎: 하여금. 사역의 의미. 百世: 백 세대. 行之盛: 성하게 행하다. 身候: 몸이 그치다. 浮名: 뜬구름 이름. 奈我何: 나에게 무엇인가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