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남진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 참전 이후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빨갱이로 휩쓸려 젊은 시절부터 이념시대의 가장자리에 있어야 했다.

직장에 취직할 수 없던 부친은 쌀집, 만화방 등 소상공인으로 1남5녀를 성장시켰다. 그녀는 다섯 째로 출생, 유년시절부터 많은 시간을 혼자 집을 지키면서 만화를 따라 그리는 등 그림그리기를 즐겨했다.

그러한 기억들은 자연스럽게 미술대학을 진학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늦깎이로 입학한 미술대학 3학년 시절(서양화전공)부터 학생회와 미술패 간부로 활동하게 됐다.

이 시기 사회적 인식을 확장하며 비판의식을 날을 세워나갔다. 시대의 정당성은 무엇인가? 화가는 사회정화를 위해 어떠한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과 번뇌를 거듭하면서 본인에게 적합한 예술양식을 위해 선배들과 토론을 했다.

이시기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이하 광미공)의 겨울미술학교를 수강하면서 민중미술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미학 아우라와 어법에 관한 양식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호암미술관의 ‘고려불화전’(1993) 관람은 감명과 충격으로 전통불화와 탱화양식에 현실과 역사를 담아내고자 했다. 그리고 학교선배와 함께 선덕사 탱화작업의 계기는 그녀의 독창적 예술양식을 찾아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5월 광주’가 가져다준 비판적 미학양식
임남진은 80년 5월, 금남로에서 시위를 구경하고 시민군 트럭에서 나눠 주는 보름달 빵과 음료수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흩어지는 ‘북한군이 광주 소요사태를 주도하고 있다’는 찌라시, 광주공원과 서현교회 부근에서 시체를 싣고 바쁘게 뛰어가는 리어카, 공포심 없이 호기심에 들어간 병원 영안실의 수많은 시체와 습한 더위, 소독약과 피와 땀 냄새, 거친 숨소리와 목 터지게 우는 어머니의 실신…. 그렇게 그녀의 5월은 의문과 호기심으로 지나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기억들은 성장을 거듭하면서 잊혀지지 않고 점차 뇌리에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아가며 더욱 선명해져 간다. 아침햇빛에 반사되는 영롱한 이슬처럼….

그녀는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아카데믹 수업을 받으면서 자신의 예술양식에 대한 고민을 거듭했다. 학생회 활동과 미술패 활동을 통한 ‘5월 광주’와 정당하지 못한 현실사회 구조적 모순, 어려웠던 성정과정에 대한 기억과 비판적 역사인식으로 새롭게 다져가며 민중미술에 대한 관심이 모아진다. 그리고 ‘고려불화’ 양식이 자신의 정서와 맞는 미학양식으로 전통적 회화기법을 찾아간다. 민중미술의 급진성보다는 상징적 은유적 어법을 선택한 것이다. 초기에는 불화의 모사에서 시작하지만 빠르게 자기예술의 형식과 내용에 종교적 한계를 뛰어 넘는 독창적 자기양식을 찾아간다.

‘떠도는 넋들을 위하여’ 194×130㎝ 한지채색 (2000)

그녀는 ‘감로탱화’ 양식으로 그려진 ‘떠도는 어린 넋을 위하여 1’(1998)을 제작한다. 화면의 상단 중앙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어린영혼의 미래를 구제하고 중단은 제단과 아귀는 영혼을 기원하며 현재의 시점인 하단은 전세의 어린영혼에게 죄를 지은 성인영혼은 고통스러운 심판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녀는 어린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그렸지만 단순한 어린영혼만은 아닐 것이다. 현세를 은유이고 상징적 이미지로 이세상의 모든 영혼을 위로하고 했을 것이며, 그 중에는 ‘5월 광주’에 희생돼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어린영혼에 대한 위로도 있으리라. 이 작품은 그녀의 나이 약관의 28세에 제작되었다.

이후 ‘떠도는 넋을 위하여Ⅱ’(2000)는 역시 ‘감로탱화’ 양식으로 ‘광주 5월’을 그린 대표작 중 하나이다. 상단에는 무등산을 배경으로 칠불이 위치해 5월 영령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중단은 제단과 아귀를 중심으로 공수부대 잔인한 진압과 염원하는 시민들, 전남도청 앞 분수대와 시민군이 있다. 아귀는 죄인에게 심판을 하는 무서운 이미지가 아닌 매우 친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어쩌면 초등학교 시절의 두려움이 없고 호기심이 많았던 그녀 자신이 아닐까? 하단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사살당하는 광주시민이 위치해 있다. 이 시기는 그녀는 광미공의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두 ‘감로탱화’를 보면 물론 회화적 완성도나 조형미는 ‘떠도는…Ⅱ’가 발전된 세련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작품제작 섬세한 기법과 완성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크게 얻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초등학교 시절에 체험했던 ‘5월 광주’는 깊숙하게 새겨진 기억이 되살아나 구체적 형상력을 획득하게 됐으리라 본다. 아마도 그녀의 눈에 비춰진 20년 주기가 된 ‘5월 광주’의 자각일 것이다.

임남진의 어린 시절, ‘5월’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와 시대를 읽어가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하고 비판적 미학관과 세계관으로 무장해가는 거름이 됐다.

또한 그러한 예술정신을 담아내는 전통회화 양식(감로탱화)은 발전을 거듭하고 다양성으로 확장시켜간다. 의문이 생긴다. 그녀가 ‘감로탱화’ 양식을 선택한 배경이 무엇이었을까?

추측하건대 하나는 그녀의 문화적 정서에 적합한 회화양식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아마도 불화양식의 도상적 구속력이 비교적 적고 작가적 창의성을 돋보이게 할 수 있었기에 선택하지 않았을까? 생각돼 진다.

이제 그녀가 10여년이 넘게 그려왔던 ‘감로탱화’ 양식은 점차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작품은 다변화를 준비한다. 전통양식에 시대의 평범한 삶을 담아내는 새로운 해석을 준비한다.


▶풍속도로 바라보는 역사의 주인들
임남진의 작품은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천도하며 현실사회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창조적인 ‘감로탱화’ 양식에서 정치적이고 비판적 성향은 점차 인간적이고 자신이 경험한 소소한 삶을 바탕으로 주변 이미지를 담아내는 작품을 제작해간다.

풍속도 ‘영흥식당’ 220×240㎝ 한지채색 (2006)

그녀는 ‘풍속도’ 시리즈를 위한 전통화 기법을 채용하지만 과거 전통적 풍속도와는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 시기 대표작 ‘영흥식당’(2006)은 그녀의 오래 동안 주변지인들과 함께 자주 드나들었던 장소, 광주의 많은 예술인이 호주머니가 가벼워도 쉽게 드나들며 삶을 이야기하고 예술 꽃을 피우며 하루를 마무리하던 허름한 주막집, 광주미술인의 사랑방을 그린 작품이다. 그 사랑방에 그녀는 20대부터 해마다 ‘5월’이 오면 선배화가들을 따라 드나들며 밤과 낮을 구분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혼재돼 거친 호흡으로 성토하던 친숙한 공간이다. 작품 ‘영흥식당’에는 아마도 그녀의 모습도 있을 것이다. 막걸리 잔을 넘기는 모습으로…. 깊은 숨을 연기에 담아 품어내는 모습으로….

작품은 대형화면에 원근법이 무시된 부감법으로 그려져 중앙에는 ‘영흥식당’이 자리하고 지붕을 걷어내어 식당 안에서 떠들고 술과 음식을 마시고 먹는 사람이 보인다. 식당에 테이블이 없어 밖으로 나와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취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많은 연잎과 연꽃이 그려져 있다. 현실사회는 진흙탕으로 자본주의의 끝없는 탐욕과 모순, 그 추악함이 겹겹이 쌓여진 중심에 소박하게 살아가는 그녀와 함께 평범한 소시민과 예술인이 있다. 그들은 시대가 어려울 때 고통을 감내하고 짊어져야 하는 역사와 시대의 주인으로 한없이 고귀하다. 그녀는 ‘영흥식당’을 중심으로 어둡고 무거운 사회를 지켜가면서 맑게 정화시키는 풋풋한 소시민의 위대함을 담아내 있다. 이 작품은 세필로 섬세하게 그려진 그녀의 30대 중·후반의 일기이다.

또한 전통 민화를 현대적으로 재 해석해내는 시리즈 중 ‘감모여재도’(2006)가 돋보인다. 간결하고 단순한 이미지로 그려진 작품에 사당과 함께 위패에는 그녀가 작품을 제작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을 통해 많은 미술인을 축원하고 기도하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제단에는 술병과 식기들이 혼재돼 그려져 있다. 고단한 미술인의 삶이거나 혼재된 현실에 대한 은유적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식기들과 술병은 지저분하거나 거추장스럽지 않다. 오히려 화병의 꽃과 함께 화려하고 제단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으로 읽혀진다. 이렇게 그녀는 전통의 재창조로 소박한 시대를 담아내고자 한다.

임남진은 90년대 중반이후 10여년간 날카롭게 세운 민중미학의 붓 칼로 작업했다면, 2000년대 중반이후 점차 자신에게 몰입해 삶의 소중함을 담아가는 일기를 기록한다. 이 시기 정치적으로는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다. 이같은 사회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민중미학의 대중적 선동의 한계도 읽어냈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민중미학의 탐구에서 보다 큰 예술바다 항해로 자기미학 출구를 이끌고 있다.


▶이름없는 바람에 일어나는 생명들
2010년 그녀는 광주시립미술관 초대전(상록전시관)과 함께 과거작품을 정리하는 분기점을 맞았다. 그리고 그녀는 관념적이고 정형화와 프레임이라는 단어는 거부해왔으며 삶의 방식 역시 그렇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점차 자유분방한 본성을 드러내며 어떠한 이념과 관념에서 벗어나 가냘픈 바람에도, 지는 꽃잎에서도 흔들리는 감성의 변화는 절제된 슬픔과 고독을 담은 소녀적 시상(詩想)을 드러내는 경향으로 변화돼 간다. 그러나 이미지의 도상과 화면구성 방식은 현대적 변용을 거듭하고 있으나 양식적으로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전통이라는 큰 그릇은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모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광주시립미술관 북경프로그램 참여(2014, 1년)와 유럽여행(2016)으로 그동안 민중미학으로 소홀했던 몸(신체)을 주제로 하는 예술적 화두에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다.

첫 시도인 그녀의 개인전(2018)은 섬세한 감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쏟아놓았다. 빈 하늘과 달, 어두워진 하늘과 전봇대 등이 소재다. 전통화 양식으로 그려진 단순한 화면을 위한 붓의 흔적으로 이끌어 놓은 화면의 미세한 차이는 그녀가 바라는 미학적 주제를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녀는 일상에 대한 소소한 이미지에 대한 소중성과 자신의 삶에 대한 관점을 달리하려 하는 것이다.

과거 삶을 돌아보고 외로운 자아를 위로하고 이름없는 가녀린 바람에 영혼을 담아내고 한다. 그녀의 변화된 가치관과 세계관의 반영일 것이다.

‘애연-몽환의 숲’ 130×80㎝ 한지채색 (2019)

또 다른 작품 ‘애연-몽환의 숲’(2019)은 깊은 산속 바위틈에서 피어오른 할미꽃을 그린그림이다. 그러나 그 산과 바위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여성의 은밀한 신체부분으로 형상되어져 여성성을 상징하고 있다. 물론 많은 이미지들이 생략돼 여성의 신비스럽고 온화함을 감정이입적이고 감각적이 페니미즘 경향의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를 페니미스트라고 규정은 무리일 것이다. 그녀를 또 다른 프레임 안에 가두는 우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임남진은 ‘5월 광주’라는 무거운 주제로 예술을 출발시켰으나 지금은 새로운 예술적 도전의 문턱에 있다. 지금까지 그녀가 경험하지 못했던 넓고 자유로운 예술바다이다. 그녀는 과거 날카로운 붓 칼이 아닌 이제는 섬세하고 가녀린 붓끝은 이름없는 바람 한 결에 들판의 풀잎에 외로움과 슬픔을 포착하고 생명을 실어 보낸다. 그 생명은 ‘5월 광주’의 영혼이던가? 그녀의 작품에 흔들리는 가녀린 꽃잎에서 서정의 감동은 다가온다.

‘스틸라이프-블루’ 50×50㎝한지채색 (2018)

※작가 약력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2007-2019 개인전 8회(서울, 광주)
▶단체초대전 2019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기념 ‘맛있는 미술관’(광주시립미술관), 5·18 민중항쟁 39주년 ‘오월전’(은암미술관), 4·16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과 약속전’(목포 오거리문화센터), 2018 제3회 세계한민족 미술축제(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4·3 70주기 동아시아 평화인권전(제주 4·3평화기념관), 2017 한국화를 넘어 ‘리얼리티와 감각의 세계’(무안 오승우미술관), 얼굴의 얼굴에서(아트센터 쿠·대전), 2016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생명물질전’(국립아시아문화전당)
▶작품주요 소장처
광주시립미술관, (주)골프존 본사, (주)중흥건설, 직지사성보박물관,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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