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생명 탄생과 고난의 현실 속 집필-

마쓰다 도키코는 ‘행진도’ 집필 전 이즈오시마(伊豆大島)의 대리교원 생활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왔다. 지인의 도움으로 거처도 혼조(本所)구로 옮겼다. 하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날로 심해졌다. 남편이 노동운동 건으로 회의를 할 때 마쓰다는 특별고등경찰의 감시에 대비해 망을 볼 정도였다.

마쓰다는 문예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대 미모의 소유자로 알려진 작가 하세가와 시구레(長谷川時雨)가 주관하던 ‘여인예술’과 작가동맹의 집회에도 자주 모습을 보였다. 그 해(1930년) 가을에는 차남 사쿤도(作人)가 탄생했다. 두 어린애의 어머니로서 육아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럼에도 장남을 탁아소에 맡기고 소비조합 부인회의 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노동자의 권리와 생활개선을 위한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편, 둘째가 태어나 혈육의 정을 나누게 됐으니 기쁨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 마쓰다는 그 기쁨과 환희를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한다.


태어난 날

먼동이 틀 때
눈을 뜬 생명
약동…정지…약동…
어머니는 힘차게 일어나
흠뻑 햇볕을 쪼이며
맑은 아침공기를 마신다…
“이렇게 태어났구나. 아가야,
새벽하늘에 전해진 너의
첫 호흡, 첫 맥박
첫 생명의 길을 나서라!”
약동…정지…정지…
약동―
태양은 떠올랐다
피보다 뜨겁구나
화살보다 예리하구나
“너와
나의
아아, 바다와 같은
우리의 집단!”
이곳에 드높게
(깃발을) 세워야 한다
빛난다
작렬하며 숨쉰다
살아야 한다
기적―
“어떠한 눈물인가
어떠한 환희의 도정인가
하지만 굶주림이 기다리고
이곳에 투쟁이 전개되리라!”
보라
찬란한 아침을 채색하는 꽃
매연―굉음
하지만 숨이 막혀도 냉정하라
허덕임, 수월한 호흡, 허덕임
몸부림, 몸부림
…골반의 흔들림…피
핏덩어리―
외침!
“볕이여, 음향이여, 사물이여
너의 울음이여!“
어머니는 온몸으로 회상한다
태어난 날!
그렇게 태어난 날을!
―1930년


희망과 꿈을 담아 차남이 태어난 날을 회상하며 노래한 시다. 노동운동가의 가족으로 태어난 생명은 고난을 숙명처럼 수용할 채비를 해야 한다. 고즈넉한 곳에서 편안하게 두 다리 뻗고 음풍농월할 수 있는 가정이 아니다.

마쓰다는 자신의 아기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를 새기면서도 “굶주림이 기다리고 이곳에 투쟁이 전개되리라!”고 예고한다. 하지만 그 굶주림과 투쟁에 회한의 마음을 품거나 참세상을 향하는 데 물러서는 일은 없다. 프롤레타리아 가정에서 태어난 새 생명이므로 고난의 현실에 맞서 강인한 아들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염원이 시에 담겼다.

마쓰다는 사쿤도를 등에 업고 작가동맹의 정례회에 참석했다. 특별고등경찰의 가택수사에도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상 속에서 조선인들의 고투와 일제의 행정 권력의 남용에 대한 질타를 주제로 ‘행진도’를 집필했으니 의미가 남다르다.


-작품의 특징과 의의-

당시 바깥 정세는 나날이 심각해지는 상황이었다. 1931년 9월 중국 봉천(奉天) 교외의 유조호(柳條湖)에서는 남만주철도 노선폭파 사건이 발생했다. 자작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중국 국민군의 소행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군사행동에 돌입했다. 그리고 만주전역의 점령을 도모했다.

당시 남만주철도 노선과 달리는 기차.

마쓰다는 이 만주사변과 조선의 식민지 지배강화 시기에 ‘행진도’를 완성한 셈이다. 즉 일본의 침략전쟁과 지배 확장정책이 노골화하는 시점에 육아와 사회활동을 병행하면서 조선인 문제를 들추는 작업에도 눈길을 돌린 것이다.

‘행진도’의 특징과 의의를 짚어본다.

첫째,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작가가 조선인을 주요인물로 등장시켜 조선인의 일상과 현안을 주목한 점이다. 그런 만큼 드문 작품이다. 작가가 고향을 등지고 떠나와 일본 내지에서 억압에 짓눌리는 조선인의 애환과 심리를 치밀히 그려냈음을 물론 그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다카하마 교시(高浜虛子)의 ‘조선’을 비롯해 동시대의 일본인 작가들의 작품 중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 일부분이지만 관심을 표명한 기술이 없지 않다. 하지만 재일조선인 출신 작가 외에는 문화통제와 시세의 틀에 갇혀 좀처럼 식민주의 해체를 지향하는 쪽으로 나아가지 못하던 시기다. 일본 권력의 역린을 건드리는 일에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던 것이다. 조선인 내면세계를 비추는 담대한 표현에 작품 평가의 시점이 놓일 수 있는 근거다.

둘째, 작가가 당시 일본 내지에서 공공연히 금기시하던 조선어 표기를 적재적소에 하고 있는 점이다. 일본 경관이 시위행진을 저지하는 장면에서 조선인 여성들은 격정적인 감정을 직설적 언어로 표현한다. 긴박한 상황에서 여성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속어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이 작품에 리얼리티와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예컨대 마쓰다는 시위를 탄압하는 경관에게는 “빌어먹을 놈”, 도로에서 손을 흔들며 응원하는 일본인 노동자에게는 “고맙소”, 시위현장에서 아낙들이 서로를 독려할 때는 “가자, 가자, 가자”, 불가항력인 경우엔 “제기랄”을 사용했다. “가자, 가자, 가자,”가 4회, “빌어먹을 놈”이 2회, 그리고 “제복(경관) 사이로 빠져나가라”라는 등의 조선어가 등장한다. 즉 작가는 극적인 순간에 조선어 음가를 가타가나로 표기해 무력에 맞서는 아낙들의 심경을 생생하게 반영했다. 그리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셋째, 조선인들이 생존권 수호를 위해 경관의 진압을 헤치고 전진하는 시위행진을 그리는 게 목적이었던 만큼 작가가 이를 조선인들의 총체적 투쟁으로 묘사한 점이다. 따라서 그 풍경은 독특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위에 참여하거니와 특히 어린애들이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선다. 그리고 남성 부재의 상황에서 여성들이 주체가 돼 시위를 전개하는 양상을 보인다. 역할과 성별과 연령을 초월해 조선인을 상대화하려한 작가의 의도에 의한 것임은 강조할 나위가 없다.

넷째, 작가가 조선인 여성의 심리묘사에 주력한 점이다. 전반부는 조선인 남성 ‘류’, 후반부에는 여성인 ‘정옥순’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류’의 체포의 시점과 맞물려 정옥순의 심리묘사가 부각된다.

최소한 조선인 부락 철거 후 이동할 거주지를 확보하기 위해 신분, 직위와 상관없이 전원이 시청을 향해 나아가는 게 주요 내용이다.

하지만 작가는 스토리 전개에 몰입하면서도 여주인공 정옥순에게 초점을 맞춘다. 일본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부터 시위 참여에 갈등하며 심적 동요를 일으키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옥순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세히 묘사한다. 그녀가 정적 인물에서 동적 인물로 변모하는 곳에서는 독자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발신한다.

그러므로 ‘행진도’는 정옥순의 성장소설로도 볼 수 있다. 옥순은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다가 고향을 그리며 동료들의 도움을 상기한다. 그리고 조선인임을 절실히 자각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쓰다는 정옥순의 시점과 내면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필치로 일제강점기 일본 내지의 조선인 여성이 어떻게 현실에 맞서고 어떻게 거친 삶 속에서 몸부림하는지를 작품에 새긴 것이다.

다섯째, ‘땅밑의 사람들’의 예처럼 주동적인 일본인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지만 한일연대를 추구하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이는 점이다. ‘행진도’에서는 먼발치에서 일본인 노동자들이 손을 흔들며 응원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니이미 난키치의 ‘아버지의 나라’(1930년)와 같은 동시기의 희귀 작품도 있다. 아무리 친조선적 성향의 작가일지라도 그 시절에 조선인을 휴머니즘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조선에서 건너온 일본 내지의 식민지인은 멸시, 비하, 소외, 피지배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1920년 후반부터 30년 후반의 시기에 언론, 표현의 자유 통제와 탄압은 학문과 사상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스기야마 미쓰노부, ‘메이지기에서 쇼와 전기까지의 일본 내 언론통제’, 2011)

일본 간세이가쿠인대 문학박사, 주오대 정책문화종합연구소 객원연구원 역임, 전남과학대 교수

특히 1928년 치안유지법 개정 이후에는 전국의 경찰서에 특별고등과가 설치됐고, 언론, 문화 탄압도 심해졌다. 같은 해 일본 내 진보적 활동가 수천명을 검거한 3·15사건을 계기로 문화, 사상 통제가 강화된 상황이 이를 뒷받침한다. 1931년엔 군국주의가 팽배한 분위기 속에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콧프) 등에 대한 탄압이 가해져 이후 수많은 문인들이 투옥됐다.

그 와중에 마쓰다 도키코는 ‘행진도’에 일본제국주의를 군화와 제복과 같은 메타포를 소환해 무력의 상징으로 묘사했다. 조선인은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항하며 해방을 절망하는 애틋한 존재로 바라봤다.

조선인의 존재와 삶을 비춘 그와 같은 도저한 시도는 우월감이나 차별의식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일본인의 시각을 타파하려는 기제로 작용했다. ‘행진도’를 계층과 시대와 경계를 뛰어넘는 소통의 텍스트로 거론하는 이유다.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