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길 공원이 된 현재의 남광주역.

광주에서 경전선의 시발점은 남광주역이라 할 수 있다. 2000년 폐역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광주·전남 시·도민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아련한 기적소리를 울리고 있다. 그리고 현재 그 자리에는 푸른길공원이 조성돼 향수어린 흔적을 느껴볼 수 있다.

남광주역이 폐역 된 지 20년이 됐어도 남도인들의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는 것은 배고픈 시절 경전선을 타고 보릿고개를 함께 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정서를 가장 잘 응축시킨 시가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다. 간혹 이름이 비슷한 남평역이 사평역의 모티브가 된 곳으로 잘못 알고 있으나 실제 모델은 남광주역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 모두들 알고 있었다 /…/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이 시는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쓸쓸한 기차역 대합실의 정경을 통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추억, 아픔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시의 화자와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고단하고 힘겨운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다. 화자는 밤늦게 막차를 기다리며 겨울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에 지친 군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피곤에 지쳐 조는 모습, 감기에 걸려 쿨럭거리는 모습, 침묵하는 모습들에서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통찰하게 된다.

화자는 이들의 삶의 애환에 연민을 느끼며 ‘한 줌의 톱밥, 한 줌의 눈물’을 ‘난로에 던지는 행위’를 통해 이들을 위로한다.

이러한 서민적 정서 때문인지 이 시는 ‘국민의 시’라 할 만큼 낭송가들로부터 꾸준히 애송되고 있다.

남광주역 끊어진 철길.

남광주역은 역광장 주변으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남광주시장이 유명하다. 벌교, 보성, 이양, 화순 등지 시골 아낙네들이 새벽기차에 해산물과 푸성귀를 싣고 와 난전을 펼친 것이 시장으로 발전해 지금까지 사람들의 활기가 넘쳐나고 있다. 이러한 시장 분위기가 ‘사평역에서’의 시적 풍경에 잘 녹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남광주역은 또한 인근 시골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의 핫 플레이스였다. 책가방을 옆구리에 낀 까까머리 남학생과 하얀 블라우스에 검정치마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이곳에서 내려 광주시내 학교로 등교하는 모습이 아련하다.

그리고 남광주역은 한때 화순탄광에서 채굴된 석탄 하역장으로 역할을 했다. 남선연탄 등 연탄공장들이 현재의 아이파크 아파트자리에 가동되고 있어서 역 구내에 석탄 화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렇다면 남광주역이 광주 학동에 문을 연 시점은 언제일까. 광주-여수간 경전선(광려선)은 남조선철도회사에 의해 1930년 12월 개통됐다. 남광주역과 학강철교도 이 무렵에 완공됐다. 당시 역 구내의 시설물로는 목재로 지은 단층의 역 건물이 있었고 그 안에 대합실이 있었다. 역 건물 옆에는 제법 큰 규모의 2층 목조건물인 남조선철도회사 영업소가 있었다. 역 앞에는 너른 광장이 있었고 주변으로 여러 채의 목조건물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었다.

영업소는 1936년 총독부가 광주-여수간 철도를 매수한 뒤 보선사무소로 사용했는데 1952년 전남대 문리대가 그 일부를 빌려 잠시 강의실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 보선사무소는 1980년대 제1 순환도로 공사 때 도로용지에 포함됐다. 현재 남광주역을 비롯한 시설 가운데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역 건물은 2000년에 철거돼 그 부지는 주차장으로 변했다.

이처럼 남광주역은 많은 추억과 노스텔지어가 스며있는 장소로서 풍성한 문학적 모티브를 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장소성과 문학작품을 엮어서 ‘남광주역 아시아문학축제’를 열면 아시아문화중심도시의 새로운 활력을 일으킬 수 있다. 기존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연극, 음악, 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확산시킬 수 있다. 또한 아시아 철도문학의 발신기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기차에서 물건 내리는 상인들 남광주역에 도착한 열차에서 시골 아낙네들이 시장에 내다팔 채소와 곡식 등이 담긴 보따리들을 힘겹게 내리고 있다. /김지연 사진작가 제공

남광주시장 옛 모습 남광주역 뒷마당에 펼쳐진 시장에서 시골 아낙네들이 좌판을 늘어놓고 물건을 팔고 있다. 이곳은 현재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김지연 사진작가 제공

아울러 현재 광주천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학강철교에 열차 모형을 만들어 설치하고 밤에는 LED조명으로 열차가 달리는 장면을 재현한다면 새로운 명물로 탄생할 것이다.

광주는 아쉽게도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표방하면서도 광주의 혼과 숨결이 꿈틀대는 콘텐츠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가장 보편적이면서 가장 광주다운 문화콘텐츠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남광주역 아시아문학축제’가 그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효천역도 남광주역과 같은 1930년 영업을 시작했으며 1933년 남광주역과 효천역 사이 백운광장에 간이역인 벽도역이 있었다.

이제는 경전선을 타려면 광주송정역이나 효천역으로 가야한다. 효천역에서 열차를 타면 90년 전 선로를 따라 고즈넉한 남도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차창 밖으로 7월 녹음 짙은 들판이 아득히 펼쳐진다. 덜컹거리는 바퀴소리에 리듬을 타며 경전선 열차여행을 시작해본다. 때 마침 ‘뿌우웅~’ 기적소리가 설레는 가슴을 파고든다. 열차는 서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해 남평역을 곧장 지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앵남역(간이역)을 스쳐간다. 몇차례 산굽이를 따라 돌던 기차는 화순역에 당도한다.


[인터뷰- 김용휴 시인] “흔연스럽게 맞아주던 목로주점 그리워”

남광주시장 입구 도로변 한 켠에 ‘남광주역에 나는 가리’라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남광주역이 폐쇄되고 2년 뒤 2002년에 광주 동구청에 의해 건립돼 오가는 행인들의 눈길을 붙들고 있다. 둥근 바위에 새겨진 시의 주인은 김용휴(77) 시인이다.

화순에 거주하고 있는 김 시인께 연락을 드렸더니 흔쾌히 남광주역으로 와주셨다. 한 여름 폭염을 피해 아름드리 히말라야시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기다리니 긴 머리에 하얀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한 평생을 시·서화와 향토사에 천착해온 노 시인의 풍모에서 예술인의 기운이 느껴졌다.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남광주역에 나는 가리’ 시에 얽힌 사연과 인생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선 이 시를 짓게 된 배경을 물었다. “경전선 철길은 일제가 우리 민족의 맥을 끊어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건설한 것이지요. 광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철길을 놓으면서 농장다리, 전대의대에서 조대병원 사이, 양림동 융프라우 등 3곳의 능선 혈맥을 끊어 놓았어요”라며 일제의 경전선 건설과정의 불순한 의도를 지적했다. 그래서 광주시내 경전선 철길을 걷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 2000년 8월 경전선이 외곽으로 이설돼 반가웠다. 그런데 경전선 운행이 중단된 지 얼마 후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남광주역 건물을 철거해버리자 몹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정든 터전이 사라진데 대한 깊은 회한이 가슴 밑바닥에서 맴돌다 2001년 터져나온 게 바로 ‘남광주역에 나는 가리’이다. “이 시를 당시 박종철 동구청장에게 보여줬더니 시비를 만들어 세우자고 하더군요. 그리고 당신 재임기간이 아니면 세우기 힘들다며 2002년에 이곳에 세운 거예요.” 그는 “남광주역 건물이 그대로 보존됐더라면 역사의 산교육장이 됐을 텐데…”라며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 시는 가수 주하주씨가 곡을 붙여 구성진 가락으로 재탄생돼 듣는 이의 가슴을 적신다.

김 시인은 남광주시장에 대한 추억이 많다. 술이 고픈 날이거나 해장술을 하기 위해 시장통 허름한 목로주점을 즐겨 찾았다. 흔연스럽게 맞아주는 술집 주인이 정겹고 하나 둘 모여드는 지인들과 질펀한 인생사를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그의 가슴에는 남광주역 새벽공기가 녹아들었다.

김 시인은 젊은 시절부터 시를 쓰며 규장각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많은 문인들을 등단하도록 도왔으나 정작 본인은 1995년 ‘한맥문학’을 통해 늦깎이로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주로 민족의 애환을 주제로 많은 시를 지었다. 또한 광주 남구 향토사를 탐구해 12년간 구보에 연재하고 ‘효(孝)브랜드’를 제안하는 등 향토문화 보존에도 실팍한 역할을 했다./박준수 기자

남광주시장 입구에 세워진 김용휴 시인의 시비

남광주역에 나는 가리 <김용휴>

설레임으로 여기 서 있다
아쉬움으로 여기 서 있다
기적소리 없는 새벽 누가 열꼬
비껴가는 허공의 구름일지라도
스치는 바람이라도
기적의 여운이라도
돌아오게 할 수 있다면
회상시켜 볼 수 있다면
광주의 새벽을 여는
남광주역에 나는 가리
삶의 질곡을 푸는
시골할매들의
먼 숨결소리라도 들으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