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개인적으로 기록한 3대 사서로 난중일기, 징비록 그리고 쇄미록을 꼽는다. 조선시대 오희문이라는 선비가 피난 중 주변의 생활을 기록한 쇄미록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들의 군량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를 첩자가 알아내 왔는데, 당시 조선군의 식사량으로 계산해보니 약 한달 분량이었다. 한 달 뒤면 왜군들의 식량이 떨어져 물러 갈거라 생각하고, 성 앞에 진을 치고 기다렸는데 어찌 된 일인지 시간이 지나도 왜군들이 후퇴하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왜군들의 밥그릇은 조선군의 1/3 정도밖에 안 됐다. 그래서 왜군들이 식량 아끼려고 밥그릇이 아닌 김치 종지에 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군이 식사량을 줄인 것이 아니다. 당시 조선 백성의 밥 한 그릇은 약 690g으로 지금보다 4-5배가 큰 엄청난 대식가였고 1940년대까지도 비슷한 크기였다, 고려시대는 1천40g, 고구려 시대는 1천300g의 밥그릇을 사용했다고 한다. 어릴 적 시골에서 큰 밥그릇에 가득 고봉으로 밥을 쌓아서 먹던 어른들의 밥그릇이 기억난다.

그런데 지금은 ‘밥 한 그릇’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의 양을 연상할까? 아마 거의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어느 식당에서라도 본 그 스테인레스 밥 한 공기를 연상할 것이다. 그런데 쌀이 남아돌 정도로 더 풍요로워졌는데 지금 밥그릇은 왜 작아졌고, 밥 한 그릇의 기준은 어떻게 정해졌을까?

1960년대 우리나라는 쌀이 부족했다. 보리나 밀가루 같은 혼식·분식을 장려했지만 밥심으로 살아온 우리의 쌀 사랑은 계속됐다. 이에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해 1973년 서울시에서 직경 11.5㎝ 높이 7.5㎝의 스테인레스 밥그릇을 한 그릇으로 표준으로 정해 시범식당을 지정 및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쌀 소비량이 나아지지 않자, 1976년 그것보다 더 작은 직경 10.5㎝, 높이 6㎝ 지금 크기의 스테인레스 그릇에 4/5만 담은 것을 한 공기로 정하고 모든 식당이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만약 1회 위반하면 1개월 영업정지, 2회면 영업허가를 취소하는 등 강력한 행정조치를 시행했고, 이 기준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지금의 밥 한 그릇이 정해졌다.

영원한 사랑과 고귀함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의 단위가 ‘캐럿(carat)’이다. 캐럿은 지중해가 원산지인 두과식물 캐롭(carob)나무 열매의 꼬투리속의 콩알 이름이다. 저울이 없어도 캐롯 한 개의 무게인 0.2g을 기준으로 무게를 계량했다. 캐롭나무 열매는 성경에 돼지를 살찌게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나 먹는 일종의 구황식물로 기록돼 있다. 별 볼일 없는 콩알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보석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 하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후 세상은 ‘변화’가 아니라 ‘진화’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당연하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고, 말도 안 된다던 것들이 말이 돼버릴 수도 있다. 기준이 좋아서 보석처럼 보일 수도 있고, 보석 같은 것의 기준이 되었으니 좋은 기준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회적 거리가 몇 미터부터인지, 몇 명 이상 모일 때는 특히 조심해야 될지, 딱히 잘 알지도 못하는 많은 기준을 어쨌든 정해야 하고, 얼굴을 기준으로 한 기술들은 이제는 마스크를 쓴 얼굴을 포함하는 기준으로 바뀌어야 할 수도 있고, 악수를 해야 할지 주먹을 내밀어야 할지, 이럴지 저럴지 기준을 정하기 애매한, 그렇다고 딱히 법으로 정할 수도 없는 것들도 많다.

‘변화’는 다시 되돌아 갈수도 있지만 ‘진화’는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다. 산업구조, 복지기준, 노무기준, 고용기준 등 많은 기준에 코로나는 ‘진화’를 경고하는데, 상충되는 이해관계나 기존 가치, 혹은 몰라서 등 여러 이유로 ‘변화’를 진화라고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지금 만드는 기준이 미래다. 사스, 메르스, 코로나19, ???? 어차피 계속 올 거라고 판단된다면 진화의 기준을 지금 ‘빨리빨리’ 만들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을 이만큼 성장 시킨 ‘빨리빨리’가 또 다시 G1으로 진화 시킬지 혹시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