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간 5·18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사진이나 그림 등을 수도 없이 봤어요. 총을 쏘거나 잔인한 장면으로 5·18을 기억하기 보다는,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극락세계에 가도록 진심으로 기도해 주고 싶었죠. ‘천도’ 지낸다는 생각으로 2017년부터 작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의 희생자 784명의 이름을 작품으로 새긴 난원(蘭苑) 정향자(74) 작가는 최근 광주 서구 화정동 작업실에서 열린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불교 사경 전문가인 난원(蘭苑) 정향자 작가가 최근 광주 서구 화정동 작업실에서 열린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 작가는 미술과 서예, 사경(寫經·불교 경전을 베껴 옮기는 일) 분야에 두루 능숙한 작가다. 광주에선 유일하게 불교의 전통예술인 사경을 작업하고 있는 그는 ‘부용당사경연구원’을 차리고 문하생들을 맞는 한편, 올해 5·18 40주년을 맞아 2017년부터 2년간 작품을 제작했다.

“가로 2m, 세로 2m 크기로, 전통사경의 형식에 현대적인 조형미를 가미한 초대형 감지금니장엄경 현대사경을 제작했습니다. ‘5·18 민주항쟁 희생자 추모’라는 제목을 써 넣었고 작품의 한가운데 정사각형 안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적었어요. 그 이름을 둘러싸고 있는 불화는 고려불화대전에서 착안해 ‘극락세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상상 속의 동물인 ‘삼족오’와 꽃비가 내리는 하늘나라의 모습, 극락조가 노니는 연못 등을 그려 넣어 희생자들이 ‘극락왕생’ 하길 바랐죠.”

정 작가에게 5·18 희생자를 추모하는 작업은 마치 ‘천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그는 5·18 당시 아이 셋의 엄마였다. 1980년 5월, 열흘간의 엄혹했던 그 시절을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며, 인터뷰 내내 눈물지었다.

“지금은 농성지하차도가 된 그 거리에 오랫동안 살았어요. 저녁이면 시민군들이 나서 횃불을 들고 소리를 질렀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인들이 사람들을 짓밟고 곤봉으로 내리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봤어요. 다음날 아침에 피로 낭자한 시체들이 즐비한, 그 끔찍한 광경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그들을 도와주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죄의식으로 이 작품을 처음 시작하게 됐습니다. 예술가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했죠.”

이 작품은 하루이틀 새에 나온 것이 아니다. 정 작가는 13년 전인 2007년부터 이 작품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으며, 5·18기록관, 5·18유족회 등에 협조를 요청해 관련 기록과 희생자들에 대한 연구와 공부를 했다.

“감지에 금을 묻혀 한 분 한 분 글씨로 이름을 써 내려갈 때마다, 이 분의 부모님은 어떤 심정일까. 평생을 어떻게 살다가 갔을까 생각했어요. 80년 당시 군부독재에 맞서 끝내 희생돼야 했던 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요. 40년 동안 갖고 살아 온 마음의 짐을 조금은 내려놓은 기분이죠.”

정 작가가 정성을 쏟아 부은 이 작품은 아쉽게도 작가 작업실에서 개인적으로만 관람이 가능하다.

“5·18 40주년을 기념해 이 작품을 제작했고, 올해 일반인 관람객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는데 좀처럼 쉽지 않네요. 좋은 기회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초대형감지금니 사경이 어떤 것인지 관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싶습니다.”

한편, 정 작가는 1981년 소흑산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1994년 곡성 삼기중, 광주 운남중 서예강사를 역임했다. 2005년 호남대 평생교육원 외래교수, 2007년 아시아문화교류재단 사경 강사, 2010년 호남대 예술대학 미술학과 강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광주미술협회 회원, 한국사경연구회 정예회원, 조선대 평생교육원 사경 강사로 일하고 있다. 광주, 서울, 미국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연 바 있다. /정겨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