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 몇 명이 어울려 원주에서 민박집을 개업한 이 보살을 찾아갔다. 녹음이 우거진 쾌적한 곳이다. 이 보살은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으며 무공해 야채도 많이 먹고 며칠 푹 쉬어가라고 한다.

보살의 외숙 되시는 분이 밭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신다. 뱀이 나올 수 있다며 지팡이로 풀숲을 헤치는 그 분을 따라 골짜기로 내려가니, 맑은 물이 흐르는 언덕 밭에 빨간 고추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모래와 자갈이 태반인, 거름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땅에서 어떻게 고추가 자랄까. 궁금해 하는 나에게 ‘자갈의 오줌’을 아느냐고 물으며, 쥐어 보라고 준 돌이 어찌나 뜨거운지 쥔 손을 펼치는 순간 내 발등으로 떨어져, 이래저래 돌 수난을 당했다.

“자갈밭의 곡식이나 채소는 자갈의 오줌을 먹고 자라는 거여. 낮 동안에 뜨겁게 달구었던 돌에 이슬이 내리면 마치 뜨듯한 오줌 줄기처럼 밭의 흙을 촉촉하게 만들어 거름이 되는 거여. 그러면 병충해도 없는 법이니, 몸에 좋은 것 많이 먹고 대처에 가서 자갈의 오줌 같은 좋은 일을 해봐.”

몇 달 동안 공사를 감독하느라 꾀죄죄한 차림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시던 그녀의 외숙은 오랜만에 말벗을 만나 즐거웠을까. 우리 곁을 맴돌며 참견하는 통에 주책스럽게 보였었는데, 평범한 사람에게서 심오한 철학을 발견한 느낌이다. 자갈에서 흐른다는 훈훈한 기운처럼 포근함이 전해지며.

이 보살, 그녀는 고생고생 살아가면서도 남을 돕는 일에는 발 벗고 나선다. 개업한 ‘길벗 쉼터’도 상호 그대로 오가는 사람들을 편히 쉬도록 휴게소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여행비가 넉넉지 못한 사람이나 사정이 딱한 길벗에게도 인정을 베푼다고 한다.

이 보살의 행동이나 그 아저씨의 말씀을 거울삼아, 평소 감정을 앞세우기 잘하는 내 버릇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이 쉽지 않다.

뜨거운 가슴만을 지닌 아이들과 인연을 맺었다. 중학생이지만 정신지체아와 자폐아로 구성된 우리 학급은 하루 종일 웃음이 끝이지 않았다.

“우~리 선~생님~은 암흑 장군, 바퀴벌레 괴인”

시도 때도 없이 만화 주인공을 내 별명으로 만들어서 큰소리로 떠드는 현, 발톱깎기가 있어야 한다고 계속 찾는 영, 기린 그림만 봐도 목이 긴 영자 씨가 생각난다고 가슴을 움켜쥐는 환. 그러면 은근히 그 아이를 좋아하는 경아는 야속하다며 토라진다. 이럴 때 누구의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지 덩치 큰 아이들 앞에서 당황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교사인 나를 놀려도, 순수한 미소가 있기에 함께 웃을 수 있고 그 애들의 행동을 탓할 수 없다. 내가 이 아이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20여 년 간의 교직생활을 되돌아보지 안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든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내가 가르치는 반의 성적은 상위를 차지해야 직성이 풀렸고, 자식들도 일등을 고집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취약성을 무시한 채 자갈을 뜨겁게 달구듯 몰아붙이며 지식을 주입시켰을 것이다. 내가 발달 지체아들을 가르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내 교육관이 투철했노라고 자부했을는지 모른다.

사랑 하나 먹고사는 특수아들에게 따스한 훈김을 얼마만큼 불어넣어 주고 있는가. 자문해 보았다.

낯선 사람 앞이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부끄럼쟁이 청년에게 급우들이 조소를 보낼 때면 내 얼굴도 덩달아 화끈거렸다.

마치 그 비웃음의 반은 나의 몫인 양. 그런 애들과 함께 생활하며 자신감을 심어 주면서 바늘귀만큼의 성장에도 큰 박수를 보내고 보람을 찾았다.

그러나 극히 작은 내 이슬방울이 그 애들의 끓어오르는 용암덩어리를 얼마만큼 식혀줄 수 있을까.

불덩이가 솟구쳐 오르는지 자기 가슴을 쥐어박는 자해아동, 그런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달래다보면 내 몸의 열기가 녹아내리는 느낌이 든다. 마치 자갈에서 따스한 김이 흐르듯이.

이정선 약력
▶한맥문학으로 등단(1992년)
▶㈔영호남수필문학협회 상임이사, 영호남수필문학협회 광주지회장, 광주여류수필회장 역임
▶영호남수필문학대상, 광주문학상, 허균문학상본상, 국제펜광주문학상 수상
▶수필집 ‘부딪치며 사랑하며’ 외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