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들을 정리하려고 꺼내다보니 묵은 메모장 속에서 빛바랜 종이가 떨어진다. 펼쳐보니 독좌비쌍빈(獨坐悲雙鬢)이란 한시가 적혀있다. 출전에 대한 정보는 없이 ‘빈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늙어감이 서럽다.’라는 해석만 있다.

이 메모장은 일본 오카야마(岡山)한국교육원에 근무했을 때에 쓰던 것이다. 어느 신문이나 잡지를 보다가 별 뜻 없이 적어놓았던 모양이다. 그날 이후 잊고 살아오기 몇 십 년, 그 게 오늘의 내 모습을 예견이라도 하고 써놓은 것 같아 이상야릇한 기분이다.

쌍빈이란 양쪽의 귀밑털을 말한다. 기나긴 가을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빈 방에 홀로 앉아 있는 파리한 노인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 하얗게 세 버린 귀밑털을 바라보는 눈에는 쓸쓸한 웃음이 스친다. 눈앞에 환하게 떠오르는 그림이다. 같은 글일지라도 자신의 처지나 환경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다르다.

‘눈 먹던 토끼 얼음 먹던 토끼가 다 각각’이라는 속담도 겪고 있는 상황이 생각을 달리하게 한다는 의미이리라.

사람은 대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한다. 행동도 마찬가지다. 취향에 따라 사물의 존재의미와 가치부여를 달리한다.

이 글을 보았을 당시에는 하루하루가 분주했고 보람과 긍지를 느끼던 터라 늙음이라든가 외로움 같은 건 생각 속에 끼어들지도 못했다. 읽는 것도 기록하는 것도 남의 이야기처럼 모두가 가벼운 마음이었다. 세월의 수레바퀴가 굴러감에 따라 몸과 마음이 날마다 변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도 나와는 상관없으려니 지나쳐버린 것이다.

이제 건강에 무게를 두어야 할 나이이고 보니 고독이라든가 슬픔 같은 단어가 예사롭지 않다. 그러려니 했다가도 하찮은 일에 외로움이 일고 책을 읽다가도 창 너머 먼 산을 바라보는 빈도가 늘었다.

아내가 곁에 있어도 그 외로움과 허전함은 여전히 가슴속을 휘젓고 친구와 같이 웃고 떠들어 보아도 공허함은 마찬가지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쳐 소란을 떠는 밤이면 더욱 그렇고 소슬한 바람에 하동하동 지는 낙엽을 보면 ‘아! 가을인가.’ 하는 노랫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인생은 반드시 외로운 것만은 아니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은 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주변을 맴도는 외로움 앞에선 웃음도 맥이 없다. 세월 앞에서 주눅이 들어 힘이 빠진 것이다. 늦게나마 독래독왕(獨來獨往)이요, 독행독사(獨行獨死)임을 알게 된 게 죄다. 결국은 혼자라는 사실이 서글프다. 날마다 그리운 이를 만나고 친구들과 어울려도 그림자 없이 흘러가는 인생길은 쓸쓸하고 씁쓸하다.

그래서 ‘늙었다는 확실한 징후는 고독이다.’라고 한 여류 소설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말이 새삼 공명을 일으킨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남자는 마음으로 늙고, 여자는 얼굴로 늙는 다고 했다. 입 밖으로 내 비치지 않아도 그 늙음의 인식이 바로 고독이다.

요임금 시대 활의 명수 예( )는 자기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래서 곤륜산의 서왕모에게 무릎 꿇고 간청하여 불사약을 얻었다. 불사라는 말에 눈이 멀게 된 그의 아내 항아는 그것을 훔쳐 먹고 달로 달아났다. 달 속의 두꺼비가 되어 숨어버린 것이다. 죄책감을 느낀 양심은 있었어도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이겨내지 못했다.

삼천갑자 동방삭(東方朔)의 설화도 흥미롭다. 전한의 무제가 서왕모에게 복숭아 30개를 얻어 왔는데 그 속에 천도복숭아 3개가 있었다. 눈치 빠른 동방삭이 용케도 천도복숭아만 모두 훔쳐 먹어 버렸다. 이를 알지 못하고 별 볼일 없는 복숭아만 먹었던 무제는 70세도 제대로 잇지 못했으나 동방삭은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이야기다.

노(老)와 사(死)를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데, 공맹이나 석가 같은 성인인들 마음의 흔들림이 없었을까.

겹쳐진 주름투성이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털, 누구라도 계피학발(鷄皮鶴髮)은 싫을 게다. 하물며 죽음을 말해 무엇 하랴. 사람으로 내어난 고뇌다. 다른 동물들에게도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있다면 그럴 때의 행동반응은 어떻게 나타날까 흥미로운 일이다.

한 발을 물러서서 내가 내 맘속을 들여다보면,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이 많음은 분명하나 그 이유를 설명하라면 말끝이 흐려질 수밖에 없다. 한심스럽게도 오래 사는 것 자체가 목적처럼 되어있어서다.

일부러 산을 찾고 건강식에 관심을 가지며, 어느 곳에 무슨 병을 잘 다스린다는 병원이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속물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유형의 사물은 변해가며 사라진다. 사라지기 때문에 가는 세월을 붙잡아두고 싶은 아쉬움을 느낀다.

어차피 유한한 삶인 것을 어쩌겠는가. 늙음이 안타깝다고 청승스럽게 한숨이나 쉴게 아니다. 긴 여행길에 오를 때까지 나이에 걸맞은 가치를 쫓아 더 절실한 이유를 찾으며 값지고 후회 없이 살아 볼 일이다.

유자 향은 농익을수록 짙고 저녁노을은 아침노을보다 아름답다. 작을지라도 꿈이 있는 한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다. 쌍빈이 희어졌다 무슨 대수이랴!


황옥주 약력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수필문학회 이사, 한국수필작가회 부회장, 전 광주수필문학회장
▶저서 및 작품론(日) : ‘吾背は猫である’(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기 살리기의 허상’, ‘하얀 귀밑머리’, ‘별을 보며’
▶일본 번역수필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