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정태세문단세’. 아이들 앞에 조선 왕들은 앞글자로 불려 나왔다.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 때 담임선생이 암기 비법으로 가르쳐준 걸 아이들은 노래 부르듯 외우고 다녔다. 그건 왕들의 이름이 아니다. 묘호(廟號)다. 근데 다른 왕들과는 달리 조선 3대 왕은 묘호보다는 사가(私家) 시절의 이름자가 더 많이 팔린다. ‘태종’보다는 ‘이방원’이란 이름이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는 것이다.

장군의 아들 이방원과 태종 이방원의 가지에는 수많은 피가 걸려 있다. 그의 ‘하여가(何如歌)’에 ‘단심가(丹心歌)’로 저항한 정몽주와 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 배다른 형제들, 처남들이 그 피를 대표한다.

그런 그에게도 두려운 존재가 있었다. ‘태종실록’은 왕의 두려움을 직필로 그려낸다. 태종이 말을 타고 노루사냥을 하다가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낙마한다. 왕이 좌우를 둘러보며 황급히 한 말이란 “이 일은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였다. 하지만 모르게 하라는 왕의 지시까지도 실록에 기록된다. 그는 또 편전에 있던 자신을 문밖에서 기웃거리는 사관(민인생)을 귀양 보내기도 했다. 유배라니, 사관을 향한 미움의 세기가 짐작된다.

이방원과 5·18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그들 사이에 놓인 공통분모를 찾는다. 사나운 피바람을 일으켜, 그 피로 나라를 강도(强盜)하고, 로베스피에르 같은 공포정치로 권력을 유지하고 등쯤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달라 보이는 구석은 없는 것인지? “이방원은 그래도 사관을 미워했다. 근데 전두환 당신은요”가 나의 답이고, 물음이다. 미움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겁을 먹는 마음이 그 기초다. 사관이 미운 건 역사를 무서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함흥차사라는 것도 했다. 아버지 태조한테 인정받기 위한 정치셈법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아버지에게라도 비는 풍경을 연출했다는 점에서 전두환과 다르다.

천하의 태종 이방원도 좀이라도 역사에 낫게 적히려고 사관을 두려워했는데, 그 사람은 당최 그것도 아니다. 목숨이 붙어 있을 때 반성이라도 하고 사과라도 하면 역사의 눈이 조금은 부드러워질 법도 한데 말이다. 무장 더 매만 벌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2017년에 나온 ‘전두환 회고록’은 자신이 자기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피나게 때린 꼴이 되었다. 헬기사격을 증언한 조비오 신부한테 “사탄, 거짓말쟁이” 어쩌고 했다가 사자명예훼손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재판 중이기 때문이다. 근자엔 또 어땠는가. 강원도 어디에서 골프 치고, 12·12 사람들과 오찬 회동하고…. 골프장에서 한 말 “광주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그의 ‘거짓말 시리즈’는 어제나 오늘이나 달라짐이 없다. 판박이다.

‘제5공화국 前史’(전두환그룹이 정권을 찬탈한 과정을 스스로 미화한 ‘승리의 기록’, 보안사 주도로 1981-1982년 본책 6권·부록 3권 발간)와 ‘12·12 및 5·18 실록’(1997년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발간)만 일독해도 전두환을 ‘5·18 총사령관’으로 지목할 수 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5·18 총사령관’이었다면, 그의 보안사 참모 5인방(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 대공처장 이학봉 대령,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 보안처장 정도영 대령)은 ‘5·18 설계자’다. 5·18은 ‘전두환과 그의 보안사’를 빼버리면 성립되지도 않고, 그 실체적 진실 또한 파악할 수 없다. 5·18 당시 계엄사령부와 공수부대 같은 계엄군은 전두환과 그의 보안사의 충직한 ‘행동대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두환과 그의 보안사를 ‘5·18 비밀창고’로 추정할 만하고, ‘5·18 기획설’ 같은 건 전두환 혼자서만 알고 있는 특급비밀일 수 있다.

이르면 연내에 5·18진상조사위원회가 출범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전두환을 증언대로 꺼내와, ‘오래된 진실’을 얘기하도록 테크닉을 넣어야 한다. 이솝우화 ‘북풍과 태양’이 그 테크닉으로 어떨지 모르겠다. 전두환의 비밀창고를 열게 하는 건 북풍이 아니고 햇볕이라 여겨지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