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식 作 ‘백악춘효(가을)’

지난 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한국 근대회화계의 거장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의 서거 100주년을 기리는 특별전 ‘근대서화-봄 새벽을 깨우다’가 개최됐다.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가 단체인 서화협회(書畵協會)의 초대 회장이었던 안중식의 작품을 중심으로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회화계를 조망했다. 그동안 공개할 기회가 적었던 국립박물관의 근대회화 컬렉션과 연구 성과를 보여주었다는 점만으로도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전시였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시간적 공간적 제약으로 안중식처럼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들만을 다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회화의 역사는 왕이 계시는 도읍인 ‘한양’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개항 후 급격히 밀려든 근대 문명의 영향으로 전통회화가 변화할 때에도 그 변화의 중심지는 ‘경성’이었다. 이처럼 우리 회화의 역사는 ‘서울’을 무대로 전개돼 온 듯하지만, 지방 미술의 흐름을 간과한다면 한국미술사의 전체상을 파악할 수 없다. 특히 ‘전통회화’라면, 서울만큼 중요한 무대가 바로 ‘호남’이기 때문이다.

이에 이번 가을, 국립광주박물관은 서울과 호남에서 각각 활동한 6인의 전통화가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은 특별전을 마련했다. 서울 화단을 대표하는 심전 안중식,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1853-1920),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1892-1979)의 작품 세계를, 그들과 동년배인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50-1941), 미산(米山) 허형(許瀅·1862-1938), 그리고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의 호남 지역 활약상과 함께 나란히 제시한다.

안중식과 함께 조선의 마지막 화원으로 불리는 조석진은 안중식 사후 서화협회의 2대 회장을 지냈다. 김은호는 조석진과 안중식에게 배운 차세대 화가이다. 한편 채용신은 전북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초상화가이며, 허형과 허백련은 진도 운림산방(雲林山房)출신의 문인화가다. 20세기 초 대한제국의 어진 제작에 함께 참여했던 채용신과 조석진은 1850년대 초반 태생으로 3살 터울이었고, 1860년대에 태어난 안중식과 허형, 1890년대에 태어난 허백련과 김은호는 모두 1살 터울의 동년배였다. 같은 시대에 태어났지만 호남과 서울 두 지역으로 나뉘어 활동한 그들의 인생은 의도치 않은 곳에서 교차하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돼, 닮은 듯 닮지 않은 저마다의 예술세계를 형성했다.

채용신 필 이석우 초상

전시는 먼저 1850년대에 태어난 호남의 채용신과 서울의 조석진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조망한다. 조선은 1876년 개항 후 서구와 일본의 근대문명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였다. 개화정책에 따른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가 급격하게 이뤄졌고 사람들의 삶도 크게 변화했다. 그러나 변화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세대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채용신과 조석진은 개항 당시 20대 후반으로 당시로서는 이미 장년층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오래된 교육제도 안에서 전통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했지만,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직업 활동은 근대화된 환경에서 이뤄져야만 했다. 전통화가였던 할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운 조석진은 청에도 다녀오고 서화미술회, 서화협회 등 근대적 미술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여전히 전통적인 색채가 짙다. 오랜 무관 생활 끝에 전라도에 정착한 채용신은 유학자나 항일의병장들과 교류하며 전통 초상화를 다수 제작하면서도 당시 신문물인 사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채용신과 조석진은 전통과 개화의 경계 위에 서 있는 화가들이었다.

한편, 19세기 말 근대화된 사회 속에서 조선시대의 ‘서화’(書畵)는 새로운 용어인 ‘미술’(美術)로 재정립됐고, ‘미술’을 위한 새로운 개념과 제도들이 생겨났다. 1860년대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들은 이러한 변화를 유연하게 흡수해 나갈 수 있었고, 이들이 우리 최초의 미술가 집단을 이끈 첫 세대가 됐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시간차를 두고 각 지역으로 전파됐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태어나 성장한 세대여도 지역에 따라 새로운 제도를 접할 기회는 서로 다를 수 있었다. 실제로 이번 전시에서 다루는 심전 안중식과 미산 허형은 1860년대 초반에 태어난 1살 터울의 동년배이지만, 서울에서 활동한 안중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가 집단인 서화협회를 이끌었고, 호남에서 활동한 허형은 전통적 도제 교육을 계속하며 지역의 운림산방을 이끌었다. 단체의 성격은 서로 달랐지만, 다음 세대 화가 지망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며 지역 예술 발전에 기여한 점은 동등하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허백련 作 ‘낚시하고 돌아가다’(좌), 김은호 作 ‘벚꽃과 새’

마지막으로 전시는 1890년대에 태어난 의재 허백련과 이당 김은호의 초기 작품 세계를 살펴본다. 그들은 전통적인 도제 교육을 받고 개인적으로 활동하던 기존의 ‘서화가’들과 달리, 근대적 학교 제도 안에서 교육받은 새로운 세대의 ‘미술가’들로, ‘전람회’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작품을 발표하며 활동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전람회는 1922년 조선총독부 주최 정기 공모전인 조선미술전람회(‘선전’으로 줄임)였다. 선전은 원칙적으로 전국의 미술가들에게 평등한 출품 기회를 보장했지만,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서울의 최신 화풍과 선전 심사위원들의 심사 경향을 살필 수 없었던 지방 화가들에게 선전에서의 활약은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1살 터울로, 일본 유학 경험을 공유하며 함께 금강산도 유람했던 허백련과 김은호도 선전 초기부터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김은호가 일본인 위주로 구성된 심사위원의 경향을 잘 파악해 선전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에 비해 허백련은 당시 전람회 경향과 동떨어진 남종화 전통을 고수하며 점차 선전에서 멀어지게 됐다. 대신 그는 광주로 이주해 ‘연진회’를 결성하고 남종화 전람회를 개최하며 전통회화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광복 이후 다양성이 확장돼 가는 미술계에서 전통회화는 과거의 위상을 잃어가고 있지만, 호남에서는 여전히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미산 허형의 아들인 남농(南農) 허건(許楗·1908-1987)과 그의 후손들, 역시 허형에게 배운 의재 허백련과 그의 제자들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미처 이번 전시에서 살피지 못한 많은 호남의 전통화가들이 끈기있게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류승진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국립광주박물관은 앞으로도 이들의 작품세계를 서화실의 상설전시를 통해 꾸준히 소개해 근대 이후 전통회화계에서 호남 지역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제고해 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