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수, 모든 이에게 신뢰 받아

1950년 마쓰다 도키코를 하나오카 사건 현장에 안내한 김일수. 조선인 징용자였던 그가 놀랍게도 중국인 포로의 유족대표를 맡아 유골발굴에 앞장선 사실은 앞서 거론했다. 그런데 김일수가 더구나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노동자들의 연대의 끈을 잇는 역할을 수행했으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김일수, 그가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오카 지역의 한중일 노동자 연대의 중심역할을 수행한 역사를 소개한다.

우선 김일수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자. 마쓰다 도키코는 르포 ‘하나오카 사건 회고문’에 현장방문 당시(1950년)의 상황을 기록했다. 김일수에 대해선 “이날 (조사)의 선두에 선 사람은 전쟁 중에 조국에서 강제 연행돼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지금은 광산지 내의 가미야마(神山)라는 부락에서 일본인 부인, 어린애와 함께 세대를 이루고 있는 김일수 씨”라고 언급했다.

김일수의 고향은 경북 동곡면(桐谷面). 일본으로 끌려온 형태는 문자 그대로 강제 징용이며 강제 연행. 마쓰다는 그 방법에 대해 “우선 연행용 군 트럭을 면(촌)의 변두리에 세어둔 채, 동승한 일본인 경관과 면사무소 직원, 혹은 면장이 마을로 들어가 예의도 갖추지 않고 남자 일손이 있는 집 문을 두들긴다. 그 뒤 열쇠를 두들겨 부수고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고함을 쳐서 수갑을 채웠으며 그래도 듣지 않으면 어디선가 권총을 지닌 헌병이 뛰쳐나와 불문곡직하고 마을 변두리의 트럭으로 연행해 실었다”고 기록했다(‘회고문’).

이우봉이 쓴 증언록 ‘재일 1세가 증언한다’(‘재일 1세가 증언한다’ 출판회, 2002)에 따르면 김일수는 3형제 중 장남이었다. 조선에서 이발소에서 일하다가 차남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왔다. 이 과정을 마쓰다 도키코는 “자물쇠를 채운 집이므로 놈들이 부수는 건 일도 아니죠. 오전 2시경…. 어머니가 울며 부탁하는데도 강제로 연행되었어요”라고 새겼다(‘회고문’).

그럼에도 김일수의 막내도 징용피해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니 얼마나 비극이었겠는가. 김일수는 처음에 조반(常磐)탄광에서 노역에 시달리다가 몇 년 뒤 자유노동자가 되었다. 그 뒤 형제 2명과 함께 하나오카로 들어와 결혼해 세대를 꾸렸다.

1950년 10월 김일수(왼쪽 끝) 안내로 현지 유골 수습에 나선 사람들. 오른쪽 두 번째가 마쓰다 도키코.

눈여겨볼 대목은 김일수가 마쓰다 도키코를 안내했을 때(1950년)에 이미 입산해 유골 수습을 진행하고 있던 중국인들도 합류했다는 점이다. 모두 김일수의 한마디 한마디를 귀담아 들으면서 현장으로 향했다. 이는 그 정도로 김일수가 출신지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아니나 다를까 같은 조선인 징용자 입장에서 그를 지켜본 이우봉이 이런 사실을 놓칠 리 없다. 이우봉은 1924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1942년 5월에 일본으로 끌려온 징용자로, 하나오카 광산에서 김일수와 함께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노동운동에 참가해 1947년 조선인과 일본인이 하나오카 자유노조를 결성했을 때 서기장을 맡은 인물. 이때 자유노조 위원장 선출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봤으니 김일수가 어떻게 자유노조 위원장이 됐는지를 그는 잘 안다.

“자유노조를 결성했을 때 하나오카의 조합원이 백 수십 명이었는데, 조선인은 삼십 명 정도였고 일본인이 다수였죠. 하지만 임원을 선출할 때 역시 김 씨가 맡는 게 좋겠다고 일본인들이 강력하게 추천하여 자유노조의 위원장이 되었죠.”(이우봉의 같은 책)

김일수는 일본인들에게는 물론 중국인들에게도 신뢰를 받고 있었다. 중국인 포로(희생자)의 유족대표까지 맡은 경위 또한 알 만하다. 김일수와 이우봉은 위원장과 서기장의 관계였으므로 해방 후 하나오카 지역 노동운동의 리더격이었던 셈.

헌데 이우봉의 증언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김일수가 조선연맹 하나오카 지부의 총무부장을 맡던 시절의 얘기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지만 문맹이어서 쓰고 읽는 게 불가능했던 그는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일본인 부인을 통해 충족했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 식사 시간에 신문을 펼친 채 부인에게 정치면을 중심으로 읽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식 하나하나를 컴퓨터처럼 비상한 두뇌에 입력해 동료들도 그에게서 정보와 지식을 얻었단다. 그의 노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또한 김일수는 화술과 아지프로(선동)를 겸비해 모두를 웃기기도 하고 듣는 이를 얘기 속으로 끌어들이며 그들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 내용도 체계적이어서 학문을 접했으면 대성했으리라 생각하며 감탄했다고 이우봉은 증언했다(같은 책).

마쓰다 도키코의 인간애 정신과 맞닿아

이러한 김일수였기에 마쓰다 도키코는 사건현장을 안내하는 그의 얘기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아직도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는 빈터가 나나쓰다테 터예요”라고 하는 김일수의 말을 듣고 “내 눈에는 그 땅밑 부분, 그 깊은 곳에 파묻힌 채 그대로 있는 22명의 백골의 소재가 지금에야말로 확실히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회고문’)고 감상을 토로했으니 말이다.

무엇이 그토록 김일수에게 조선인과 중국인 피해자 사건의 해명에 앞장서게 한 것일까? 증산 제일을 외치는 일본제국주의가 불법적 노동을 강요해 조선인 동료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마쓰다의 언설을 빌리면 “침략적 군국주의 정부야말로 이처럼 잔인하게 자국에서 일하는 인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또한 조선인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어떠한 항의도 묵살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체제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차타니 주로크씨에게 입수한 이우봉의 저서 ‘재일 1세가 증언한다’

하지만 김일수에게는 그에 앞서 타고난 성품이라고 할 정도로 철저한 인간애 정신이 배어 있었다. 그에게서 일본인 노동자와 중국인 포로, 조선인 징용자를 애써 구별하려는 시점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인간애 정신이 마쓰다 도키코의 시선과 맞닿아 있기에 주목을 끄는 것이다.

김일수가 피해자의 유골 수습에 착수한 것도 인간애 정신의 발로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유노조에 가입한 조선인과 일본인 조합원 전원을 동원해 3일동안 단체교섭을 벌인 장면(이우봉 증언, 49년경)은 그의 활동 중 압권이다.

김일수는 조합원들에게 “모든 일을 중지하고 읍사무소로 모이도록” 지시를 내렸다. 100여명 이상이 지역 사무소로 모이자 김일수는 모든 이의 앞에서 선동적인 연설로 유골 수습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단체교섭을 명분으로 지역 관청의 대표에게 강력히 요청한다.

“오늘 어느 쪽 어느 현장에 제가 직접 다녀왔는데, 이러이러한 상태였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관청에서 책임을 져야한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제안하는데, 안정소(安定所)의 노동자를 이 현장으로 10명, 저 현장으로 10명, 도합 20명을 투입해 하루라도 빨리 유골을 수습해서 화장한 뒤 유골함에 넣어 절에 안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관청 대표, 당신은 이 고장의 책임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나요?”(같은 책)

김일수와 조합원들이 3일간에 걸쳐 항의의 목소리를 드높이자 관청의 대표는 굴복하고 만다. 김일수는 100명 이상의 조합원들을 이끌고 관청 대표의 방까지 쳐들어가 관청에서는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오카 지역에서 희생된 중국인들의 유골을 발굴하는 작업이 최초로 시작되었다.

인간애 정신에 근거한 김일수와 조합원들의 노동자 권익을 위한 활동이 하나오카 사건 진상규명의 실마리를 풀었던 것이다.

배려와 신념이 투철한 성격 드러나

김일수의 배려와 신념이 투철한 성격은 그의 사교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우봉은 독특한 화술과 선동적 표현 외에 김일수가 교섭에 능한 점을 거론했다(같은 책).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상대방과 마주할 때면 상대방을 치켜세운 뒤 본론으로 들어가 능숙하게 요구하는 바를 관철시키는 사례를 들었다.

이우봉의 눈에는 무엇보다 김일수가 스케일이 큰 사람으로 비쳤다. 중국인 순난자의 유골 발굴, 본국송환 운동이 하나오카에서 일어나 확대됐을 때 중일우호 추진을 위해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지위고하를 떠나 불행에 처한 약자(노동자)를 배려하려는 투철한 신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이우봉은 그러한 배려와 신념의 근저에는 “제국주의, 군국주의를 철저히 증오하며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학대받는 민족, 민중의 연대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그의 살아 있는 사상이 있었다”고 피력했다. 마쓰다 도키코의 정신과 김일수의 정신이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언설이다.

김정훈 <일본 간세이가쿠인대 문학박사, 주오대 정책문화종합연구소 객원연구원, 전남과학대 교수>

마쓰다 도키코와 김일수는 조선인과 중국인 피해자의 진상규명과 유골수습, 유골의 본국송환 운동을 함께했다. 1950년 요시다 자유당 정부는 하나오카 사건 희생자에 대한 최초의 위령제가 도쿄 아사쿠사에서 열렸을 때 철투구 경관대를 파견해 방해했다. 또한 1953년 같은 곳에서 개최된 ‘희생자 위령제 대법요’ 때도 철투구 경관대를 동원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권력의 탄압과 억압에 굴하지 않고 마쓰다 도키코와 김일수는 유골 송환 후에도 일본 각지의 보고회와 집회 등에도 동석해 당시의 실상을 전하며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고발했다. 그런 시점에서 보면 둘은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였다.

한편, 김일수와 이우봉 등의 조선인이 앞장선 활동은 지위와 신분을 의식하지 않고 상호부조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나아가 순수한 인간애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점을 평가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일본인과 중국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일본 지식인 마쓰다와 함께 한중일 노동자가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이 됐던 이유다.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