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삼복(三伏) 더위의 한가운데인 중복을 지나며 성하(盛夏)로 접어들었다. 산으로 바다로 피서를 떠난 인파로 피서지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그도 저도 아닌 이들은 견공처럼 늘어져 있으니, 伏(복)이라는 한자가 이리도 잘 쓰였구나 싶다. 싸락눈처럼 소복이 쌓인 빙수나 얼음을 동동 띄운 수박화채, 냉 콩물 국수를 생각만 해도 온몸이 한결 시원해진다.

알록달록 장식한 팥빙수를 앞세워 더위를 피하며 ‘첫눈’을 생각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그것은 눈이 왔구나, 겨울이구나 싶게 살짝 왔다 간 경우가 많았다. 날씨가 잔뜩 흐리고 찬 바람까지 제법 불어 하얀 결정체가 풀풀 날리다가도 아직 덜떨어진 기온에 비로 변하기 일쑤인 것이 첫눈이었다. 그래서인지 ‘첫눈’하면 햇병아리 시절이 떠오른다.

첫사랑, 첫 열매, 첫 차, 첫 등교, 첫 출근. 모든 것에 ‘첫’을 붙여 보았더니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힘을 알겠다. ‘처음’에서 날것의 비린내가 나는 것은 생소함과 막막함, 기대와 설렘이 혼합된 독특한 모양새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리라. 그 강렬한 냄새는 아쉬움으로, 혹은 따뜻함으로 기억의 언덕에서 연무처럼 피어오른다.

그 미숙의 시절을 잘 지냈노라, 기억에 남는 이는 홍세화 님이다. 그가 쓴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본다.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저자는 1979년 3월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차 유럽으로 건너갔다 한국에 돌아올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에 가입한 것이 드러나 난민이 된 것이다. 그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나 먹고 살 일이 걱정이었다. 프랑스식 교육을 받지 않았으니 유력한 기업에 취업할 수도 없었고 수중에 자본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홍세화 씨는 호구지책으로 택시 운전을 하게 되었다. 서울도 아닌 파리에서 택시 운전을 하려니 길을 몰라 자주 헤매었다. 어느 날 택시에 탄 청년이 몽마르트르로에 가자고 해서 당연히 몽마르트르 언덕 쪽에 있으려니 짐작하고 길을 갔는데 그쪽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잘못 들은 척할까 하는 얄팍한 생각이 스쳤지만 결국 정직하게, 길을 모르니 가르쳐주라고 말하였다. 그가 초보자라 미안하다고 사과했을 때, 청년은 이렇게 대꾸했다.

“초보자라고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모든 직업에 데뷔 시기는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몽마르트르로는 꽤 중요한 길이니까 잘 알아두세요.”

작가는 이 말에 큰 용기를 얻었다.

나의 자녀도 인생의 데뷔를 앞두고 있다. 봄부터 시작된 취업 전쟁은 아직까지 진행형이다. 첫 면접이라 너무 떨려 제대로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아이의 말에 내 마음도 무너졌고, 임원 면접까지 갈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아했다. 그들이 세상에 나가는 것이 마치 첫눈을 보는 것 같다. 설렘과 기대와 두근거림으로 밤을 새우게 하기 때문이다. 쉬 합격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아이는 삼복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험과 면접 준비로 밤을 새우고 있다. 어디선가 이 노고를 알아주는 곳이 있으리라.

아이가 어디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든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한 대목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인생이란 묘한 것이어서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대학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주던 시대는 지났다. 어디에서 복병처럼 암초를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첫눈이 함박눈처럼 펑펑 내릴 수도, 호랑이 장가가는 날처럼 잔설만 날리다 사라질 수도 있다. 프랑스 청년이 했던 말처럼,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그것은 작은 실수를 용납하라는 것이 아니라, 실수에도 주눅 들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다. 아이가 어디에 있든지 오뚝이처럼 일어섰으면 한다.

첫눈 오는 계절이 되면 첫눈과 함께 좋은 소식도 날아들었으면 좋겠다. 펑펑 함박눈처럼 내렸으면 좋겠다.


<약력> 2016년 대한문학 수필 등단, 광주문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무진주수필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