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자 선생 왈 “그 동안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스승님들께. 오늘 점심 대접하고 싶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들은 K의 너털웃음이 내 귀를 때린다. 스승의 날을 핑계로 우리 삼총사는 가슴을 맞대고 맘껏 웃으며 두터운 정까지 듬뿍 나눴다. 이런 위트로 감싼 영자 선생의 진한 배려의 향기는 우리 서로에게 삶의 바다를 헤쳐 갈 힘이 되어 주곤 한다.

그랬다. 우리 셋은 30년 지기 문우로 삶의 대부분을 같이 어울리고 서로 부딪치며 살았다. 함께 하다보면 은연 중 깨달음도 얻고, 때때로 새로운 것도 배운다. 우리는 취향 이상의 뭔가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무작정 베풀다가도 가끔은 쓰디쓴 충고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내가 비틀거리면서 인생의 돌다리를 건널 때는 굳건히 손잡아 주었던 고마운 벗들이다. 나와 다른 성향의 그들이었으나 자기만의 노하우로 내 인격을 요모조모 다듬어 준 스승 같은 친구들이다. 그 중에도 영자선생의 행동거지는 특별했다. 시도 때도 없이 베풀며 공자의 인(仁)을 몸소 실천하고, 맹자의 의(義)를 본받아 불의를 보면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는가 하면 그녀는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바를 이루도록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도 해준다. 정녕 그녀는 우리들의 사표이기에 큰 스승의 대열에 끼워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4대 성인에게 주어진 묵계(默契), 공자를 대신하는 ‘子曰’은 그녀에겐 감히 못 붙이고, 아들자(子)가 아닌 스승자(子)로 대접하여 ‘榮子曰’이라 일컫고 싶은데, 언제부터인지 수림이라는 필명만 사용한다. 하긴 물과 숲으로 어우러진 수림(水林)이니, 자연 역시 스승 중에 스승이라 하지 않던가.

느긋한 오후의 산책 길. 아카시아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사람 사이 오가는 정의 향기를 어찌 꽃향기에 비할까. 할 수만 있다면 그 향기에 취해 살고 싶다. 작은 꽃들로부터 시작되는 봄 잔치처럼 사람 사이의 도타운 정도 사소한 배려에서 시작된다.

시린 겨울 이겨낸 봄 들판에서 우연히 마주친 앙증맞은 꽃들, 그것들을 가까이하면 눈보다 후각이 더 즐겁듯이 내 주변에서 오가는 작은 정들에 가슴 가득 훈향이 넘쳐 난다. 이런 작은 꽃들을 마주하면 그윽한 향에 절로 눈을 감게 된다. 영락없이 사랑하는 가족이나 내 주위 분들이 내게 베푸는 진한 배려의 향내다.

명심보감을 강의하는 코미디언 김병조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은 ‘배려’라고 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남에게 베푸는 데는 인색하고 상대에게 받는 것에 익숙해져 거지근성이 도사린 나다. 이제라도 영자스승의 흉내라도 내볼까? 가만히 웃어주는 것도, 따뜻이 손잡아 주는 것도, 상대의 이야기에 말없이 귀기울여주는 것도 불가에서는 보시라고 했다. 영자 선생 같은 벗이 있어 입은 물론이요, 눈도 마음도 호사로웠다.

지천이 꽃인 꽃길을 다니다보면 발밑에서도 꽃향기가 난다던가. 우정이라는 길에 어우러진 향기로운 꽃은 더 말해 무얼 할까. 세월 따라 작아지는 돈주머니 대신 내 치마 폭에 채워진 작지만 고운 내 마음의 향주머니, 이제부터라도 그 속 향기의 정수(精髓)들을 모아 보련다. 그래서 그리 멀지 않은 날 구슬처럼 알알이 꿰인 그 보석들의 빛깔로 영자 선생을 비롯해 내 주변 가까운 이들을 취할 수 있게 하기를, 나는 감히 기대해 본다.


<약력> 92년 한맥문학으로 등단, ㈔영호남수필문학협회 상임이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영호남수필문학협회 광주회장과 광주여류수필회장 역임, 영호남수필문학 대상, 광주문학상, 허균문학상 본상, 국제PEN광주문학상 수상, 수필집 ‘부딪치며 사랑하며’, ‘걸림돌을 디딤돌로’, ‘원의 버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