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다랗고 길쭉한 나라 칠레, 거길 가면 ‘민중의 자결’을 상징하는 궁전을 볼 수 있다.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모네다궁. 아옌데 대통령의 비장한 최후가 묘비처럼 눈 아픈 곳이다. 1970년 세계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 그는 1973년 9월11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방장관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에 맞서 모네다궁에서 싸우다 권총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남긴 마지막 라디오 연설은 세계인의 가슴을 흔들어 깨운다. “우리가 수천, 수만 칠레인들의 소중한 양심에 심어 놓은 씨앗들은 일격에 베어 쓰러뜨릴 수 있는 게 아님을 확신합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만드는 건 민중입니다….” 이후 피노체트의 독재정권이 17년 동안 이어졌고, 칠레의 민주화 여정도 중단되었다.

이 대목에서 5·18은 왜 바람처럼 휙, 날아드는가. 아옌데가 1980년 5월의 광주와 동격이라면, 피노체트는 전두환과 동급으로 다루어도 전혀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 피노체트의 폭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모네다궁과 최후의 항쟁지 전남도청, “역사는 민중이 만든다”는 아옌데의 그 처절한 울림과 광주를 지킨 도청의 푸른 혼들, 피노체트의 미국과 전두환의 미국은 동종인 것인가, 피노체트의 압제 17년과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철권통치 13년, 뭐 이런 것들이 내 속을 잠시 일렁거리게 했다 함이다. “무식한 외국 사람이라고 깔보지 말고 지금부터 내 강의를 들어보세요. 강의를 듣고 나면 여러분이 얼마나 한국 역사에 무지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한국 땅에 와 강의할 때면 노상 이런 일침부터 놓는다는 그는, 브리검영대에서 34년 간 한국사를 강의해오다 작년 3월 은퇴한 마크 피터슨(73) 박사다. 광주사랑이 각별했을까, 전두환을 학문적으로 반대하기 위해 ‘광주 리포트’를 쓰기 시작했다 한다. 천하의 전두환과 미국을 무 캐먹다 들킨 아이들로 만들어 버린 그의 펜은 강했다. 마치 그들의 속내에 들어갔다 나온 것 마냥 예리하게 슈팅을 날린 게 1987년에 발표한 ‘미국과 광주사건’이란 논문이다. 그는 스스로 “광주진압은 쿠데타의 한 단계였다. 12월(12·12)에 시작되어 이듬해 8월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까지 이어진 일련의 쿠데타 진행 과정 중의 하나였다”는 것과 “전두환과 전두환그룹(신군부)이 정권찬탈을 위해 광주에서의 폭력사태를 지극히 치밀하게 준비하고 과감하게 실행했다”는 것, “미국의 책임 부분”을 키포인트라고 압축한다. 5·18 당시 주한미국대사였던 글라이스틴과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을 만나 인터뷰한 걸 토대로 쓴 거여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튼 족쇄 채워진 국내 5·18 펜들(연구)을 적당히 흔들어 놓았던 거 같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내란의 추억’이란 글(2014년 2월 ‘한겨레’ 신문)에서 “5·17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노태우 일당은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내란목적살인이었다”고 적은데 이어, 내란의 기술을 콕 찍어 올린다. “내란범은 자신들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내란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광주항쟁을 내란으로 몰았고, 또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다”고 말이다. 그니까 제가 내란해놓고 거꾸로 광주가, 김대중이 내란했다고 생사람 잡은 꼴이었다.

꼭이 피터슨의, 한홍구의 연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전두환의 쿠데타는 가히 세계신기록감이다.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끌었던 쿠데타로 평가받고 있어 그렇다는 거다. 1979년 12·12로 시작해 1980년 5·17, 5·18을 거쳐 9월1일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자그마치 246일 만에 완성시켰지 않은가.

전두환은 쿠데타가 특수전공인 모양이다. 2017년 4월에 나온 ‘전두환 회고록’이 그걸 극명하게 보여준다. “(5·18) 당시 나는 계엄군의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지시하거나 실행하기 위한 그 어떤 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참석한 일이 없다”며, 정부와 국회, 검찰, 법원 등의 공적 역사 기록을 전면 부정했기 때문이다. ‘광주사태’와 관련, 몇몇 대목에서 다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전두환이 그 다툼을 회고록이란 도구를 통해 역사의 공간으로 밀어 올려, 제 편이 아닌 ‘나쁜 기록’을 휘정거려한 전술이었으므로, ‘역사쿠데타’ 말이 나왔다. 최근엔 그의 아내까지 쿠데타에 합류했다. “남편은 민주주의의 아버지”란다. 남편을 광주법정(1월7일)에 내놓지 않기 위한 술수임이 뻔히 보이지만, 이쯤이면 역사쿠데타 수준을 벗어난다. 비난만이 능사가 아니다. 관찰이 있어야 한다. “미처 청소하지 못한 쓰레기더미처럼 전두환과 그의 세력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는 한홍구 교수의 말을 허투루 듣지 말고 그 잔재의 크기를 가늠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이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 3명을 자당 몫으로 추천하지 못하고 있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도 가릴 일이다.

관찰이 끝나면 성찰이 와야 한다. 전두환을 잡는 전두환학(學)이 약하다는 거다. 5·18이 전두환내란(반란)사건인데도 ‘광주사태’ 관련 전두환 행적 하나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둔 것이 없으니, 전두환이 둘려먹어도 둘려먹은 줄이나 알 것인가. 전두환은 지금 한창 역사를 쿠데타 중인데, 제 속에 감춰둔 진실을 무슨 수로 끄집어낼 것인가. 전두환이 다시는, 또 다른 쿠데타를 맘속에 넣지 않도록 하는 건 지금의 우리들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