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 소설가 문순태 선생을 만났다. 나이 80이 되셨단다. 필자가 언론계 막 들어온 20대 때 40대 문순태소설가는 잘 갈아진 칼로 무를 싹뚝싹뚝 써는 것처럼 명쾌한 글을 쓰셨다. 필자가 문선생의 나이에 놀라자 ‘시간’에 대해 말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축적되는 것이다’

시간이 축적될 때, 문제는, 옳게 축적되느냐 그르게 축적되느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정치의 시간은 더욱 그렇다. 2013년이었던가? 한국 부패정치에 신물이 났던 호남사람들은 안철수라는 정치 신인에게 애틋한 감정을 가지며 정치혐오와 정치무관심 늪에서 국민을 구해줄 것 같은 기대를 걸었었다. 결국 2016년 안철수를 중심으로 탄생한 국민의당에 호남은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며 1석을 제외하고 광주·전남 국회의원 자리를 모두 내주었다.

양당제는 한계가 있다고 본 국민열망에 의해 현재 한국에는 5개 정당이 존재하는 다당제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20대 국회 구도는 더불어민주당(121석)과 자유한국당(116석)이 전체 의석 80%를 차지해 기존 거대 양당 체제 속에 소수3당이 목소리를 좀 내는 수준이다.

이 와중에 6·13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통합해 이념적 온건성과 합리적 중간지대를 표방하는 ‘중도개혁신당’을 창당한다고 하자 호남 국회의원이 다수 포진해있는 국민의당이 분당 위기다. 국민의당(39석)과 바른정당(11석)이 ‘통합추진협의체’를 가동하자, 국민의당은 통합파(21명)와 통합 반대파(국민의당지키기운동본부 소속 18명)가 갈라섰다. 안철수 대표가 이런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면 국민의당 통합파와 바른정당이 통합한다 해도 ‘중도 신당’은 32석에 그치고 나머지 국민의당 통합반대잔류파도 원내교섭단체 구성마저 어렵다.

리얼미터가 정초에 발표한 정당별 지지도는 더불어민주당 50.3%, 한국당 16.8%, 국민의당 6.2%, 정의당 5.7%, 바른정당 5.6%였다. 제3신당이 시대적 요청이며 정치개혁의 실마리를 풀어낼 것이란 기대로 한때 호남의 강한 열망을 담아냈던 국민의당은 지지율 6.2%는 너무 실망스럽다. 창당 2년이 되어가지만 정당으로서의 새로운 플랫폼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철수 대표가 정치에 입문하며 창당을 추진했던 시점은 2014년 초 지방선거를 앞두고서였다. 새정치연합을 창당하려던 안대표는 민주당과의 합당을 전격 선언하며 정치권을 놀라게 했다. 이후 2015년 말 주류인 친문재인 세력과의 갈등 끝에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해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당시 국민의당은 지지기반인 호남을 중심으로 지난 19대 총선에서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호남 여론은 지난 대선을 분기점으로 민주당으로 확 기울었다. 호남은 대선 당시 문 대통령에게 60% 대의 전략적 투표를 했고, 정권 출범 이후에는 95%라는 압도적 지지가 유지되는 흐름이다. 특히 내분사태까지 겹치자 국민의당에 대한 호남 민심은 이미 바닥을 친 상태다.

백년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이념·지역·세대기반이 필요하다. 창당 2년 동안 국민의당은 기존 정당과 완전히 차별화되는 대표정책, 인물, 철학을 제시하지 못했다. 국민의당이 분당해서 호남의원들 몇이 새로운 당을 만들 경우 ‘호남 자민련’이 생기게 된다. 자민련이 어떤 당인가.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탄생하고, 문민정부 출범 이후 ‘부패세력 척결’을 내건 민주계의 압박이 거세지자, JP는 1995년 탈당,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자민련과 JP가 앞서 이끌었던 공화당과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지역색이었다. 9석에 불과했던 의석을 다음 15대 총선서 50석으로 늘리며 강력한 제3당이 됐지만 충청당을 벗어나지 못했다.

국민의당 호남계 의원들은 탈당해서 개혁신당을 만들면 약 18명 안팎의 호남지역당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묻고 싶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합집산하면서 새로운 정당을 만들고 부수고 갈라서는 것이야 자유지만, 호남이 왜 제3당을 그토록 원했는지 자문해보기 바란다. 바른정당과 합당하려는 분이나 호남자민련을 만들려는 분이나 2년 전 국민의당 창당때 호남에 약속했던 시대적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갈라서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호남인이 양당 경쟁체제를 만들고 새정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진 것은 호남정치가 꼭 풀어야 할 두 가지 시대적 과제 때문이었다. ‘호남의 소외, 경제적 낙후 극복’, ‘한국사회 민주주의 완성과 개혁의 선도’.

호남은 5·16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그 결과 경제적으로 크게 낙후되었고 호남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져 희망을 잃었다. 돈이 돈을 낳고 재산은 자자손손 상속되기 때문에, 한시바삐 비상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호남의 경제적 낙후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계속 대물림될 것이란 위기감, 이런 차별은 극히 부당한 일이며 반드시 시정돼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당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우리는 믿었다. 새 호남정치는 그 길을 뚫고 앞장서지 않았으며 호남의 낙후를 극복할 정치환경도 만들지 못했다. 호남 발전의 비전과 구체적인 정책도 마련하지 못했다. 호남은 국민의당에 그 임무를 부여했지만 호남의 낙후를 극복하고 한국사회의 개혁과 진보를 선도할 개혁정치세력을 새로 키우지도 못했다.

해서, 통합·분당·창당 전에 국민의당 안철수대표와 의원들은 국민의당 탄생을 간절한 마음으로 도왔던 호남인들에게 그동안 무엇을 했고, 이후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당신들과 함께한 호남의 시간은 어떻게 축적되어있는가. 당신들의 정치적 선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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