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되어 무대에 선다. 이건 내게 꿈같은 일이었다. 그 꿈같은 일이 버젓이 벌어졌다. 꿈에 나타난 일이 아니고 백주대낮에 이뤄졌다. 얼씨구, 좋다. 절로 추임새가 나올 지경이다. 꿈이 꿈에 머물지 않고 현실화된 것은 광주문화재단 빛고을시민문화관의 공연장상주단체운영사업 일환으로 시민대상 퍼블릭프로그램-시민연극 ‘나도 배우다!’에 참가함으로써 이뤄졌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늦가을 정취가 한껏 익어갈 무렵 소위, 시민배우들이 빛고을시민문화관에서 모였다. 16-18명 정도였던 것 같다. 현진건의 단편선을 읽어나갔다. 빛고을시민문화관 상주단체인 극단 푸른연극마을(대표 오성완)의 지도로 진행된 이번 퍼블릭프로그램은 상반기의 1차에 이어 두 번째였다. 1차 땐 카프카의 작품을 분석했고 그 중에서 ‘변신’을 최종 선택해 낭독극 무대에 올렸다. 다소 어려웠던 작품이었다. 그에 반해 2차 낭독극으로 준비한 현진건의 작품은 시대만 다를 뿐 우리의 정서를 그대로 담아낸 단편들로 친근하기 그지 없었다. 주변인들에게도 권했다. 한번 낭독극을 해보라고. 모두들 바쁘단다. 결코 물러서지 않고 ‘바쁜 중에 뭔가를 하는 법’이라며 문화도시 광주에서 문화시민 노릇을 하라고 끈질기게 권유했다. 정극은 아니더라도 연극 비슷한 것을 한번 배워보자는 계속된 꼬드김에 얼마 못가 한명이 홀랑 넘어왔다. 그이는 출장이네 뭐네 하며 몇 번 빠졌지만 끝까지 해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었다.

필자역시 출장과 업무가 겹쳐 연습일정을 착실히 채울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같이 연습하는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포기하지 않고 낭독극에 찰싹 달라붙어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꿈같은 무대에 섰다. 바로 지난 일요일 오후의 일이다. 근대소설의 한 축을 담당했던 현진건의 대표작 ‘운수좋은 날’로 9명의 시민배우들은 멋들어지게 무대를 이끌었다. 난생처음 연극을 가지고 무대에 선지라 다소 떨리는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자신 있게 무대에 서서 배우고 익힌 대로 낭독을 하였더랬다. 많지 않은 관람객들이 자리한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잘했다기 보다는 재미있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한번도 연극이란 걸 해보지 않은 이들이 나와 연극을 한답시고 대사를 치고 지문을 읽고 하는 폼이 때론 우습기도 하고 때론 그럴싸하게 보이기도 했을 터이다.

이 낯설고 생경한 경험이 기분 좋았다. 무엇보다도 전문 연극배우들만이 서는 것으로 알았던 무대에 그냥 시민일 뿐인 내가 서게 되었다는 거, 그리고 서투르게나마 지문을 낭독하고 짧게나마 대사를 쳐보았다는 거, 되게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거기다가 밤늦게까지 이뤄졌던 연습 과정에서 전문연극배우인 강사들과 시민배우들이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게 또 다른 수확이었다. 자연스레 연극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고 저 무대가 얼마나 어려운 과정에서 탄생하게 됐을 지가 절로 짐작이 가게 되었다. 그동안 클래식 음악엔 관심을 가지고 콘서트장에 자주 방문했지만 연극무대는 개인적으로 낯설었다. 연극이란 매체에 대한 이해도가 훨씬 배가되면서 교육의 효과가 높아졌다.

시민배우들의 면면도 독특했다. 그림 그리는 화가가 2명을 비롯해 여행사 직원, 일반기업체 직원, 공무원 등이 한 데 어우러져 1920년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가지고 함께 호흡했다. 아마추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연극인같은 느낌을 가진 시민배우들도 몇몇 있었다. 참, 세상은 평등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연극적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주로 이들이 대사를 치는 주인공, 즉 김첨지와 치삼역을 맡았고 나머지 시민배우들은 주로 나레이션을 쪼개어 맡았다. 김첨지와 치삼의 능청스런 연기가 리허설 때나 본 무대에서나 객석은 물론 무대에선 시민배우들까지 배꼽을 잡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필자는 연극무대에 서보았다. 재미만이 아니라 연극이란 예술의 장르를 이해하는 작은 물꼬였던 것 같다. 친구들에게 뻐기게 되었다. “나, 무대에 서 보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