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체제 더는 어렵다. 분권형 개헌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당한 직후 국회 소추단장 권성동 의원의 발언이다. 옳지 않다.

우리 헌법이 유별나게 흠결이 많아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생겨났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3월10일의 헌재 판결은 그런 게이트를 제어하고 최고권력을 파면시킬 수 있는 우리 헌법의 탁월성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우리 헌법은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뒤처지지 않는 수준으로 평가 받는다.

그럼에도 지금 개헌이 화두인 것은 헌법에 문제가 많아서가 아니다. 1987년 개헌 이후 30년, 꼭 한 세대가 흘렀다. 국가적 과제, 시대의 요구, 민주주의의 처지, 사회경제적 삶의 토대가 달라졌다. 시간의 숨결에 헌법의 호흡을 맞춰야 할 필요가 생겨난 것이다. 문제 많은 헌법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좋은 헌법을 더 좋게 만들 필요가 개헌논의의 토대여야 한다.

고쳐야 할 것은 헌법이 아니라 그 이전의 법령·제도·규범이다. 한국전쟁 직전에 국가보안법(1948)이 등장했고 지금까지 확고부동하다. 휴전 이후 만들어진 선거법(1958)이 여태 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박정희 군사쿠데타 직후 다듬어진 정당법(1962)도 지금까지 그대로다. 박정희 독재체제에서 만들어진 노동관계법, 집회 및 결사에 관한 법규범(1960-1970년대) 또한 오늘날까지 유효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 법령들이 사상의 자유, 정치적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정당설립의 자유, 단체행동의 자유 등을 억압하고 있다. 이 법령들이 국정원과 검찰권력을 비호하고, 경직된 양당체제를 고착시키고,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자본의 위험한 질주를 돕고 있다. 아무데나 종북딱지를 붙여도 저항이 없는 사회분위기 또한 이 법령들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장 늦게 만들어진 87년헌법이 모두 허용하고 있는 기본권을 민주화이전 법령·제도·규범(이하 민주화이전 법규범)들이 제한, 억압하고 있는 꼴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민주화’와 함께 등장한 좋은 헌법과 ‘민주화 이전’부터 지속되어 온 나쁜 법령의 동거라는 기묘한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 우리는 ‘투표자이기는 하지만 시민은 아닌’ 취급을 받았다. 투표하는 날 하루만 온전히 ‘시민권’을 인정받는다. 투표가 끝나면, 민주화이전 법규범에 따라 통치에 순응하는 ‘국민의 의무’만 남게 된다. 이때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숙성 시간이다.

엄밀히 말해 광장의 촛불은 ‘사후수습’ 같은 것이다. 촛불을 들지 않아도 시민의 뜻에 권력이 반응하는 일상의 정치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민주화이전 법규범의 대대적인 정비가 방법이다. 사드 반대, 탈핵주장, 비정규직 철폐, 정당한 파업 등이 종북몰이, 불법시위, 불법파업으로 매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히려 법규범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곪기 이전에 정치권의 반응을 이끌어 내 ‘사전예방’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여의도 정치권은 87년헌법의 ‘권력구조’ 고치기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 속내에는 민주화이전 법규범의 문제를 은폐하고 존속시키려는 의도가 있다. 그것이 그들의 이념기득권(국가보안법), 정당기득권(정당법), 여의도기득권(선거법), 자본기득권(노동관계법), 통치기득권(집시법 등)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대통령 권력을 일부 떼어 내어 의회로 옮기자는 지금의 개헌논의는 적절하지 않다. 의회로 옮길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더 쉬운 탄핵, 더 간단한 국민소환제를 헌법상에 명시해야 한다. 그래야 투표가 없을 때도 정치권이 시민의 요구에 반응한다.

촛불시민의 힘으로 헌법과 법률을 고칠 공간이 확보되었다. 이 공간을 여의도 정치권이 독점하도록 둘 수 없다. 대통령보다 국회의원이 더 선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민주화이전의 법규범을 그대로 둔 채 헌법의 권력구조만 바꿀 경우 ‘박근혜식 왕정’이 ‘국회 귀족정’으로 옮겨갈 가능성만 높인다.

대통령 파면 이후 ‘촛불의 시간’은 ‘정치의 시간’으로 옮겨갔다. 이제는 대통령을 파면시키는 촛불이 아니라 ‘일상의 시민권’을 확보하기 위해 촛불을 들어야 할 때이다. 대한민국에서 시민으로 살기, 참으로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