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헌법재판소는 칼수루헤 지역에, 연방중앙은행은 프랑크푸르트에, 철도청은 본에 두고 있다. 7시 뉴스는 뮌헨에서 9시뉴스는 본에서 11시 뉴스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한다. ‘독일 전역의 생활수준은 비슷해야 한다’는 헌법정신에 따라 독일은 철저하게 지역분권체제를 구현하고 있다. 독일은 2차세계대전의 폐허를 딛고 지금 세계 최대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분권시스템이 잘 작동할수록 민주주의, 인권, 안보, 경제 등 그 나라의 주요 지표가 좋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선진국들은 예외 없이 ‘지역분권’이 탄탄하다. 지역분권 강화는 또한, 발전이 정체된 국가에 활력을 불어 넣기도 한다.

프랑스는 1980년대 들어 경제성장률이 1.6%대로 떨어졌다. 1985년 미테랑 정권은 ‘지방일괄이양법’을 제정해 중앙정부 권한을 지방정부로 대폭 넘겼다. 이후 프랑스 경제성장률은 2%로 올랐다. 일본 역시 1999년 ‘지방분권일괄법’을 시행해 1% 경제성장률을 2%대로 끌어 올렸다.

노무현 대통령 참여정부 때 추진한 행정수도 이전이나 공기업 지방 이전,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세종특별자치시 추진 같은 정책이 지역분권을 확대하려는 노력이었다. 중앙과 지방의 상생을 꾀하고, 대한민국을 더 크고 강한 나라로 키우려는 노력이었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제동이 걸렸다. 수도권 규제를 풀어 기업의 지역 이전을 막았다. 세종시 계획을 무력화시키려 했고, 기초지자체 폐지를 시도했다. 성남시와 민주당이 법까지 만들어 추진한 무상공공산후조리원 사업을 박근혜 정부는 시행령으로 틀어막기까지 했다.

그 결과 나라꼴이 참담해졌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지표들이 추락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중앙집중을 강화했다. 그나마도 중앙집중의 ‘공적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보니 순전히 사익을 추구하려고 자기네들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다는 게 드러났다.

최근에 화두가 된 ‘개헌논의’는 이처럼 과잉화한 대통령 권력을 쪼개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 개헌논의의 주체가 대략 손학규·반기문·국민의당 정도이고 그 내용은 ‘중앙정부 대 국회’ 수준의 분권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새로운 세상을 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문재인 전 대표와 김부겸 의원이 제시한 ‘연방제’에 준하는 분권까지 시도할 필요가 있다. 현직 단체장인 이재명·안희정·박원순 등 민주당의 대선주자들도 지역분권 추진 의지는 분명하다.

필자는 여기에 ‘단계별 분권원리’까지를 보태야 우리사회가 더 힘차게 전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앙정부-광역지방정부-기초지방정부-동(면)-리(마을)로 이어지는 국가조직 체계의 전체적인 흐름이 분권의 기초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게 단계별 분권원리이다.

중앙정부에게는 “권한을 달라”하면서 기초지자체에게는 “내 말을 들어라”라는 이중적인 태도가 광역시·도의 행태이다. 또 광역시·도를 향해서는 “자치권을 침해하지 말라”고 하면서 동과 마을은 통제하려는 것이 기초지자체의 모습이다. 지자체들 간의 관계를 ‘상하 위계질서’로 여겨서 생겨난 좋지 않은 관행이다.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정부들’은 상하관계일 수 없다. 국가권력이 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간섭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각자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 자기 수준에 어울리는 자치권을 보장 받아야 한다. 이 자치권을 뒷받침하는 ‘분권개헌’이 뒤따라야 대한민국의 큰 도약이 가능하다.

자기의 삶터에서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누가 얼마만큼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가 사회진보와 민주주의의 수준을 결정한다. 더 많은 자치가 더 많은 진보를 가능케 한다. 어제의 권력은 일부에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내일의 권력은 여럿에게 흩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 좋다.(※자세한 논증은 졸저 <자치가 진보다>, <내일의 권력> 참조)

헌법재판소는 광주에, 한국은행은 부산에, 철도청은 대전에 있는 나라, 7시 뉴스는 전주, 9시 뉴스는 대구, 11시 뉴스는 강릉에서 하는 대한민국을 상상해 본다. 청와대와 국회만 서울에 남겨 놓는다 한들, 우리나라 망하지 않는다. 더 좋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