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집권 정당은 보수당이었다. 하지만 내각에는 노동당, 자유당, 국가자유당 등 의석을 갖고 있는 모든 정당이 참여했다. 전쟁이라는 비상한 상황에 국가의 존립을 지키기 위해 거국일치내각을 꾸린 것이다. 총리는 처칠이었다.

대통령의 집무를 정지시킨 대한민국의 촛불민심은 혁명에 준하는 수준의 ‘국가대개조’를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을 바꾸고 집권당을 교체하는 건 오늘의 위기에서 탈출하는 첫 걸음일 뿐이다. 자본권력, 사법권력, 외교·안보시스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관계 등 국가운영의 총체적 기조를 그 근본에서부터 바꿔야 나라의 미래가 열린다. 그것이 촛불민심의 판단이다.

그런데 과연, 민주당의 단독집권으로 이런 일들을 다 해낼 수 있을까? 박영수특검의 활약이 눈부시다 해서, 헌재의 선택지가 탄핵말고는 없다 해서, 새누리당과 바른정당으로 나뉘었다 해서 이 땅의 수구세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꺼진 불씨도 다시 보라 했는데 그들은 꺼진 불씨가 아니다. 언제 다시 살아나 산천을 불태울지 모른다.

때문에 조기 대선이 부여한 정치적 과제를 대통령 한 명 바꾸는 정도로 협소하게 설정해서는 곤란하다. 을사늑약 이후 1백년이 넘게 쌓여 온 적폐 해소의 기회가 지금이다. 한국전쟁 이후 반백년 동안 고착된 냉전체제를 해체시킬 기회 또한 지금이다. 민주당의 단독 집권으로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고칠 수 없다.

사실, 정권교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단독집권은 더 어렵다. 우선과제인 정권교체를 위해서도 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은 힘을 합쳐야 한다. 후보단일화 따위의 수준 낮은 정치공학을 작동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정권교체 가능성을 100%로 높이고, 그 이후 개혁과제 수행을 위해 지금부터 연합정부 플랜을 작동시키자는 제안이다.

민주당과 국민의당과 정의당의 지지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다르지 않다. 각 정당의 사이즈, 스타일, 지지기반 따른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차이는 각 정당이 갖고 있는 특장점이기도 하다. 이 특장점을 연합정부의 틀로 수용해 개혁과제를 최대치로 완성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국민의당이 비교우위를 갖고 있는 교육·IT 관련 내각은 국민의당이 담당하고 맡기고, 정의당이 비교우위를 갖고 있는 노동 관련 내각은 정의당이 꾸려 가자는 상상이다. 이렇게 하면 의회의 공조체제도 훨씬 튼튼해질 것이다. 개혁과제를 옳게 추진할 수 있는 탄탄한 국정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영국의 처칠은 전쟁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모든 정당을 국정에 참여시켰다. 우리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은 지금 ‘내부전쟁’이 터지기 직전의 상황이다. 탄핵과 조기 대선이 마무리되면 임기 3년을 남겨둔 지금의 정당체제는 치열한 ‘전쟁’에 돌입할 것이다. 이 전쟁의 본질은 수구세력의 부활이냐, 구시대의 적폐를 불씨 하나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해소하는 것이냐 이다.

촛불민심은 완벽한 적폐 해소를 요구하고 있다. 적폐 해소의 중요한 방안 중 하나로 지역과 시민이 더 많은 권력을 갖는 자치·분권 시대의 개막 또한 촛불민심의 강력한 요구이다. 정치권은 이 요구를 실현해야 한다.

민주당과 국민의당과 정의당이 ‘작은 차이’로 티격태격했다가는 적폐 해소는커녕 뜬 눈으로 수구세력의 부활을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시민권력은 자리잡지도 못한 채 제2, 제3의 김기춘·우병우의 등장을 악몽처럼 쳐다봐야 할지도 모른다. 누구도 이런 악몽을 기다리지 않는다. 하지만 악몽을 꿀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박지원 의원이 국민의당 당 대표로 뽑혔다. 박 대표는 맨 먼저 “연합·연대에 대한 국민의당의 답은 결선투표제”라는 일성을 정치권에 내 놓았다. 결선투표제는 연합정부를 전제했을 때만 의미가 있다. 연합정부 없는 결선투표제는 변형된 후보단일화에 불과하다.

박 대표의 정치감각, 호남지지 기반 등을 고려할 때 그가 말한 결선투표제의 대상은 반기문 보다는 민주당에 가깝다. 그러니까 지금 국민의당은 연합정부 사인을 민주당에 보내고 있는 셈이다. 이제 민주당이 답할 차례이다.